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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우리는 성주 주민이다 / 서재정

등록 2016-08-03 18:04수정 2016-08-03 22:07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1963년 베를린에 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열변의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광장을 메운 베를린 시민들은 열광했다.

물론 케네디는 베를린 시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간단한 말조차 독일어로 할 수 없었다. 전문 통역사의 도움으로 번역한 후 그 독일어 발음을 영어로 표기해서 읽어야 할 정도의 ‘외부세력’이었다. 동독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에 ‘잠입’한 그는 물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와의 전쟁 첨단에 서 있는 자본주의의 외로운 섬, 베를린 시민을 선동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성공했다. 20세기 세계사의 한 축이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그 전선에서 서베를린을 확실하게 자본주의 진영에 포획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신을 베를린 주민과 일치시켜 미국의 물질적 지원만이 아니라 유기적 일체감을 만들어냈다. 서방세계의 연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침묵이 금이라면 말은 강력한 무기다. 케네디의 한마디는 냉전을 승리로 이끄는 무기였다.

하지만 그 성공은 승리가 되지 못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섣부르게 외친 ‘역사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평화’는 21세기에도 요원한 꿈으로 남아 있다. 냉전 승리를 위해 지원했던 이슬람 전사들은 알카에다가 되어 미국을 괴롭히고 있다. 서툴게 들쑤셔놓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시리아는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고, 유럽을 난민의 진통으로 앓게 한다. 한때 세계를 휘감았던 신자유주의 광풍은 이제 그리스, 영국, 심지어 미국마저도 국가주의로 휘감는 역풍이 됐다.

21세기적 혼돈의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 자신의 정책에서 엿볼 수 있다. 케네디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베트남 파병을 대폭 확대하고 전략적 마을소개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베트남 주민의 평화와 행복보다는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우선이었다. 그 체제경쟁의 수혜자들을 위해 미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결과 돌아온 것은 미국 패전이었고 남베트남공화국 패망이었다. 케네디가 대변하는 ‘베를린 시민’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정책은 모두의 불행으로 되돌아왔다.

또 하나의 이유는 케네디 대통령의 핵전략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적국 공격의 수준에 맞춰 보복의 양과 질을 조절하는 스마트 보복 전략을 채택했다. 그 결과 모든 수준의 군사대결에서 우위를 누리겠다는 이 전략은 모든 수준의 군사경쟁을 가속화했다. 그러한 무한 군비경쟁은 전세계를 수십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 위에서 ‘세계평화’를 말하는 모순을 낳았다. 케네디가 대변하는 ‘베를린 시민’을 위해 모두의 안전이 위태로운 세계가 된 것이다.

케네디는 갔으나 그의 정책에서 볼 수 있는 모순적 결과들은 오히려 21세기에 더 악화됐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정책은 이제 1% 금수저를 위해 99% 흙수저를 희생시키는 구조가 됐다. ‘미국의 평화’는 이제 미국도, 미국의 동맹국도 더는 평화롭지 못한 세상으로 구현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주를 방문하지 않는다. 1963년 케네디가 베를린 수호를 장담했다면 2016년 성주는 미국 수호를 감당해야 한다. 베를린이 20세기 냉전의 최전선이었다면 성주는 20세기 냉전의 유물이다. 핵미사일을 한 손에 쥐고 미사일 방어를 다른 한 손에 들어 ‘미국의 평화’를 구가하려던 20세기의 꿈은 21세기에도 미망으로 남아 있다.

하여 사드를 반대하는 성주 주민은 새로운 21세기를 열고 있다. 인간의 평화롭고 안전한 삶이 곧 안보이고, 작은 마을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다. 이제는 모두가 케네디의 발언을 이렇게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성주 주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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