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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러기 아빠를 위한 만가

등록 2005-10-30 17:27수정 2005-10-30 17:27

이인우 사회부 교육팀장
이인우 사회부 교육팀장
아침햇발
“K선배, 이젠 그만해도 되잖아?”

“….”

“들어가겠다고 해봤어?”

“내가 가기 싫어 안 가는 거야.”

“얘들도 다 대학 갔잖아?”

“그래서 가봐야 더 할 일이 없어. 난 괜찮아.”

한 기러기 아빠의 슬픈 죽음이 알려진 뒤 어느 선배와 나눈 맥락없는 대화의 일부다. 그는 기러기 아빠다. 벌써 수년째 혼자다. 50대 초반의 홀아비 아닌 홀아비 생활은 뻔하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쓰고 좋은 책을 출판했으나 돈을 모으는 재주는 별로 없는 ‘전통적인’ 지식인일 뿐이다. 그런 그가 기러기 아빠인 것은 ‘전통적인’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이란 이름의 멍에를 거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적 인생관과 ‘한석봉 어미’와 같은 역사적 교훈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 교육에 거는 기대는 사활적이다. 기득권층에 속하든 아니든 교육의 성과를 통해 신분의 상승·유지가 가능하다는 신화를 똑같이 품고 산다. 그래서 거시적인 교육정책에서조차 한쪽은 기득권 수호에 집착하고 다른 한쪽은 기회의 그물코를 넓히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거듭한다. 현재 한국의 교육 문제는 그래서 일종의 계급투쟁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지금 글로벌화라는 외환과 양극화라는 내우를 동시에 겪고 있다. 이 전대미문의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영영 낙오한다는 불안감이 만연하다. 외세지배, 전쟁과 궁핍, 개발시대의 탐욕을 경험해온 한국인들이 그 대응책을 ‘교육투쟁’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갈수록 좁아지는 기회의 문에 접근하는 가장 공평한 길은 교육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큰 틀에서 평준화 교육 제도를 고수해야 할 가장 큰 명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고교 평준화가 학력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학업성취도를 높이고 있는 조건이 되고 있다는 한국교육개발원 의뢰 연구팀의 조사 결과(?5n<한겨레> 28일치 보도)는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다.

하지만 국제화의 바람을 타고 거세게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둑 안에만 가두어 두는 일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기러기 아빠는 “제도를 믿느니 차라리 내가…”라는 각개약진 사회가 낳은 슬픈 단면이다. 좀더 다양하고 현실적인 대안들이 존재했다면 기러기 아빠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월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시도와 국제화에 맞는 교육방식들을 우리 사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인색하지 말자. 무역특구 안에 국제학교를 짓고 내국인을 입학시키는 따위와 같은 예외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최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 또한 공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예산을 최우선 집행하라고 전 사회가 한목소리를 내보자. 공교육을 건실하게 하는 것만이 현재 국면에서 한국 사회가 그나마 숨통을 열어 놓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백년대계의 길이다.

“엄마, 조기 유학생의 63%가 실패했대. 그래서 난 조기유학 같은 건 가고 싶지 않아.”

선생님에게 기러기 아빠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초딩 딸애의 말 속에는 아빠에 대한 걱정이 에둘러 담겨 있다. 효녀로다 싶어 기특하기에 앞서, 능력 없는 아빠는 가슴이 아리다.

그래, 믿어보자. 우리나라를. 교육열 세계 1위인 부모 밑에서 자라고, 세계 제일의 가시덤불 대학입시도 헤쳐가는 한류의 나라 졸업장을 들고 어디 간들 경쟁을 못하리.

이인우 사회부 교육취재팀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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