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의 핵잠수함 한 척이스코틀랜드의 기지를 출항하고 있는 모습을 영국 국방부가 지난 3월에 공개한 사진. 최근 테리사 메이 정부가 출범한 직후 영국 의회는 310억파운드(약 47조원)를 들여 노후한 핵잠수함 4척을 모두 교체하고 새 잠수함을 건조하는 핵전력 현대화 사업을 통과시켰다. 영국 국방부 제공/ EPA 연합뉴스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가 13일 취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최후 수단의 편지’(Letter of Last Resort)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영국이 적의 핵 공격을 받고 정부의 최고 지휘부에 이변이 생겼을 경우 대응 방법과 보복 공격할 핵 타격 대상 목록까지 적어놓은 총리 명령서다. 메이가 안보 강경파이긴 하지만, 실은 전임 총리도, 그 전 총리도 쭉 그랬다.
영국의 신임 총리는 육필로 4통의 ‘편지’를 작성한다. 이 편지들은 즉시 밀봉돼 영국이 보유한 4척의 트라이던트 핵미사일 잠수함 함장에게 각각 전달되며, 전임 총리의 편지는 개봉하지 않고 폐기한다. 최악의 비상시에 개봉하는 이 편지는 서방 자본주의 진영 대 동구 공산주의 진영이 파멸적인 핵 경쟁을 벌이며 대립하던 냉전의 산물이다.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미국과 러시아도 갖추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문자 그대로 ‘최후 수단’이지만, 편지가 열리는 사태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 해체된 뒤에도 한동안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조약에 묶여 있었다. 양쪽이 ‘공포의 핵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군비통제를 실현하는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미국은 2001년 조지 부시 정부 때 이 조약을 탈퇴한 뒤 동유럽에 러시아를 겨냥한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늘날 서방이 러시아의 군사적 강경 대응을 부른 한 원인이 됐다.
지금 한국에선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북한 미사일 방어용이라지만, 중국의 예민한 군사 신경을 건드는 전략 무기라는 게 상식이다. 이 바람에 한반도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대결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사드가 핵 억지력을 전제로 한 ‘최후 수단’이 아니라 당장 우리의 국익과 한반도 평화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란 이야기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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