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너희가 속초 갈 때 우린 거실 갔다

등록 2016-07-20 18:36수정 2016-08-09 14:46

전종휘
디지털콘텐츠팀 기자

지난주 금요일(7월15일) 밤은 대한민국 게임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 될 것이다. 이날 강원도 속초로 가는 영동고속도로는 이른 시각부터 미어터졌다. ‘포켓몬 고’ 게임 속 괴물 캐릭터를 잡으려는 20~30대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6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일부 나라에서 게임이 출시된 뒤 한국에선 속초와 그 일대에서만 포켓몬 고를 즐길 수 있다는 소식에 디지털 세상은 주초부터 들썩였다. 주말 속초행은 이들에겐 일종의 성지순례였다.

젊은이들이 “가자 동쪽으로”를 외치던 시각, 서울에 사는 50대 중후반의 남성 두 명은 조용히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우리 집이다. 그들은 거실에 당구대가 있다는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거실+당구대’란 언어의 조합이 중년 남성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쥐 죽은 듯 잠자던 판타지의 멱살을 사정없이 잡아 흔든 게 틀림없다. 두 중년 남성의 눈빛에선 성지순례를 하는 이들의 경건함과 호기심이 동시에 발산됐다. 그날 디지털 세대가 속초에서 스마트폰 속 바이트 덩어리 포획에 ‘꿀잼’을 느낄 때, 40∼50대 아날로그 중년들은 거실 당구대 위의 둥근 분자 덩어리에 큐로 물리적 타격을 가하며 ‘풍류’를 즐긴 셈이다. 이로써 7월15일 밤 기념비는 속초와 조치원, 두 곳에 동시에 세워졌다.

15일 밤 손님들과 치른 경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달아올랐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다.
15일 밤 손님들과 치른 경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달아올랐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다.
거실 당구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리 집에 강림한 뒤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네 후배 ㄴ군까지 가세해 2 대 2로 편나누기 게임을 한 것도, 4구 기준 150점을 치는 선수 여럿과 경기를 한 것도 처음이어서다. 250점을 치는 내가 만날 30∼50점 수준의 아내, 아들과 치는 동안 채우지 못한 헛헛함도 가셨다. 내기를 걸다 보니 게임 몰입도는 급상승했고, 열기를 식히기 위해 나는 맥주를 계속 들이켜야 했다. 미안하게도, 이날 소박한 내기 당기의 최종 승자는 나였다. (친목 도모를 위해 두어 시간 동안 판돈 몇만원짜리 내기 당구 친 일을 갖고 경찰이 ‘도박장 개설죄’ 적용을 검토하진 않을 것으로 믿는다.)

이날 내 안방대첩 승리에 의문을 품은 한 선수가 “집에 당구대를 뒀으면 점수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제기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우사인 볼트가 저 같은 거북이랑 100미터 달리기 연습한다고 기록이 단축되겠어요?” 순간 우리 집에 함께 사는 한 어른 여자 거북이와 어린 남자 거북이 두 마리의 분노한 눈길이 등덜미에 날아와 꽂히는 듯했다.

symbi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1.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2.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윤석열-김용현 “의원 아닌 요원”, SNL 찍나 [1월24일 뉴스뷰리핑] 3.

윤석열-김용현 “의원 아닌 요원”, SNL 찍나 [1월24일 뉴스뷰리핑]

트럼프 2.0의 북-미 정상회담과 위태로운 세계 [기고] 4.

트럼프 2.0의 북-미 정상회담과 위태로운 세계 [기고]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5.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