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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걸그룹의 눈물을 악용하지 말라

등록 2016-07-17 19:10수정 2019-06-30 19:19

남지은

대중문화팀 기자

“이 많은 아이돌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이돌 음악 전문 비평 웹진 <아이돌로지>가 펴낸 <아이돌 연감 2015>를 넘기다 보면 저 말이 절로 나온다. 지난해 데뷔한 아이돌은 총 60팀(324명)이란다. 그중 걸그룹이 37팀(187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언뜻 떠오르는 그룹이 있는가? 인지도 쌓기에 성공한 걸그룹은 손에 꼽을 정도다. 요즘 대세로 떠오른 ‘여자친구’ 정도일까.

대부분 1~2년도 버티기 힘든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을의 입장이 돼서 ‘속도전’을 펼쳐야 한다. 이엑스아이디(EXID)처럼 팬들이 직접 찍은 행사 영상(직캠)이 유튜브 등에서 뒤늦게 화제가 되어 ‘역주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데뷔 직후 티브이 출연이 생사를 가른다. 거대 기획사 소속이 아니라면, 방송에 얼굴 한번 내비치기도 어렵다. 기획사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멤버들을 데리고 방송사를 돌기도 하고, 피디가 만나줄 때까지 집이며 회사며 따라다니기도 한다. 남자 피디한테는 술을 사고, 여자 피디한테는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하는 식의 연령별·성별 피디 공략 노하우도 있다. <뮤직뱅크> 녹화가 있는 날이면 한국방송(KBS) 앞 커피숍에는 온갖 기획사의 매니저들이 집합하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피디들은 “연예인이 갑”이라고 하소연하지만, 거기에 해당하는 연예인은 극소수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선 많은 쪽이 약자다. 시켜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걸그룹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방송사는 ‘이용’한다. 방송사들이 걸그룹을 우르르 데리고 만든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들은 가수가 아닌 눈요깃거리로 전시된다. <본분 금메달>(한국방송2)은 걸그룹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예뻐야 한다더니 몰래카메라로 출연자들의 몸무게를 공개했고, <프로듀스 101>(엠넷)은 연습생들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명분으로 실력에 등급을 매기고 높낮이가 다른 무대에 올려 노래를 시키는 잔혹함도 드러냈다. 최근 논란이 들끓은 <잘 먹는 소녀들>(제이티비시)은 가학성, 선정성,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걸그룹 멤버 8명을 스튜디오에 불러 1대1 토너먼트로 누가 더 잘 먹는지 대결하고, 이를 남자가 대부분인 방청객들이 구경했다. 미성년자도 포함된 ‘소녀’들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장장 4시간 동안 번갈아가며 먹었다. 다 불어터진 자장면이 맛있다며, 카메라와 방청객을 향해 연신 애교와 미소를 보냈다. 섹시하게 먹기 대결에 신음 소리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는 식의 선정성 논란도 제기됐다.

일부 프로그램 제작진은 “그래도 그들한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의미있다”는 말로 자신들을 변호한다. 기획사 관계자들이라고 해서 걸그룹의 인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티브이에 얼굴 한번 내비치기 힘든데, 이렇게라도 일단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기회를 준다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그 선택 역시, 그들을 통제·관리하는 기획사와 방송사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 아닌가. 그들을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고도 조명할 방법은 많다. 솔지, 루나처럼 <복면가왕>(문화방송)으로 뒤늦게 노래 실력이 드러나는 걸그룹이 적지 않다. 얼굴을 가린 역설인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시청자들이 나서서 항의하고, 해당 걸그룹의 팬들조차 인권침해를 멈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이다. 방송사 보이콧을 선언하는가 하면, 기획사에 전화해 출연하지 말라는 요구도 했단다. 논란이 커지자 <잘 먹는 소녀들> 제작진은 포맷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프로그램을 잠정 중단했다. 약자의 꿈이 미끼가 돼서는 안 된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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