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 다녀오는 길이다. 제법 부담스런 참가비를 내고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등록을 하려고 찾은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발표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망설였다. 기본소득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치고 보는 것은 임금인상이 개량적이라며 발끈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많은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냥 거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많은 경우 빵을 달라는 사소한 요구에서 출발해 세상을 뒤바꿀 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기본소득을 마냥 지지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기본소득이 시장경제를 넘어서거나 제한하는 전략으로 제구실을 하려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편이다. 기본소득은 현물 대신에 현금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화나 용역보다는 각자 알아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주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경제에서 돈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에서 자본이란 돈을 낳는 돈이란 뜻이다. 물질생활이 좀더 안락하고 기름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돈을 가져다주기에 생산도 하고 투자도 하는 게 시장경제다. 편익, 효용을 추구하는 게 경제활동의 목표라고 설레발을 치지만 그것의 목적은 아무튼 더 많은 돈이다. 돈은 그렇게 경제를 굴린다. 따라서 돈이란 필요한 것을 얻는 데 유용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그런데 돈을 준다? 뭐 이런 물음을 던지자는 게 나의 각오였다. 발표를 하러 집을 떠나며 조금은 주눅 든 기분이었다. 기본소득 열혈 지지자들이 모이는 자리일 텐데 혹시 산통 깨는 소리라고 야유라도 들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웬걸. 발표 순서를 기다리기 전 기웃거린 자리에서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었다. 기본소득에 “꽂힌” 이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실눈을 뜨고 비판을 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거의 빈사 상태에 처한 줄만 알았던 한 낱말이 되살아나듯 보였다. 그 낱말은 미래였다. 미래? 물론 오늘날 그 말이 아주 쓰임새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미래란 20년 모기지 만기이거나 연금지급 시점이거나 아니면 카드청구서가 도래할 때를 셈하는 경우에나 쓰는 말인 듯 취급당한다. 미래란 개념이 한 세기 전 행사했던 황홀한 위력에 견준다면 지금 그 낱말이 처한 사정은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미래란 개념에 선고된 숱한 죄목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것이다. 진화론적, 선형적 시간관이 만들어낸 사생아 운운의 고발은, 그런 말을 뇌는 자들의 부끄러운 무지를 알려줄 뿐이다. 미래를 입에 올리는 순간, 그것은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래란 것이 의식의 대상에 떠오르고 불안감이나 설렘을 안겨주는 순간, 그것은 다른 세계를 예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예상하는 일, 미래를 설계하는 일,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당연히 정치다. 세상사를 다스리는 일도 정치지만 그것은 그저 기술적인 행정에 가깝다. 진짜 정치란, 미래라는 낱말에 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전문 정치가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세상을 설계하려는 꿈 많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이다. 입씨름에 시끄럽고 소란스러웠지만 장마 어름의 작은 강의실은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듯했다. 미래란 시간이 희미하게 발광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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