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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시인들의 옛집

등록 2016-06-30 18:21수정 2019-10-17 16:35

김병익
문학평론가

예술가들의 옛집에서 감동받는 것은 그의 때가 묻은 물건들과 그 아우라 때문이다. 외국 예술가들이 사후에 받는 예우가 더 정중하고 보수적인 것은 예술가 당대의 생활 풍경, 그의 실제 삶과 사연들이 품은 아우라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리라. 우리 예술가들의 복원된 집들은 실물보다 크고 멋진 대신 실감을 잃고 있다.

근 80년에 이르는 나의 생애 동안 세상은 참으로 많이 발전하고 풍요로워졌지만 햇빛 뒤의 그림자처럼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겠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시골집들이 황폐해지고 아담한 동네에서 현대적 생활을 누릴 아파트로 뻔질나게 이사 다니면서 전날의 어릴 적과 젊은 시절의 거리 풍경, 동네 모습이 사라지거나 변했다. 얼마 전 서울 가회동 골목길을 거닐면서 그 오밀조밀한 샛길과 낯익은 정서를 불러주는 한옥들에서 반세기 전에는 못 알아본 삶의 다정함을 회상하고 정지용처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옛정을 되살린 적이 있었는데, 옛 동네와 묵은 집들에 대한 ‘향수’는 쉬 지워지지 않기는 나뿐이 아닌가 보다. 근래 북촌에 이어 서촌의 한옥 동네가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우리네 젊은이들까지 북적이고 있음을 보고 확인했다.

시인 황동규는 ‘사라지는 문학의 텃밭들’(<본질과 현상> 2016년 여름호)에서 26년 동안 살아온 아파트 지역이 헐리고 새것들 짓느라고 그동안 익숙해온 거리와 이웃들이 변하고 그래서 체험과 상상력의 ‘텃밭’을 잃는 섭섭함을 슬며시 고백했다. 태어나 자란 고향이나 오래 산 동네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킨 작가나 시인들에게 이런 변화는 그게 아무리 멋진 집과 큰 건물, 번화한 거리라 하더라도 그리운 상실감을 불러줄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의 아파트 동네는 익숙지 않지만 이 글을 읽으며 떠올린 그의 집은 회현동의 일본식 이층집이다.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의 대학 시절 나는 그의 이층 방에서 순수한 열정과 순진한 상상력이 어울린 젊은 자작시들을 낭송해 들려주던 그의 높은 목소리와 아래층 우리 소설문학사에 또 하나의 높은 봉우리를 이룬 그의 아버지 황순원 선생님의 방에서 훔쳐 온 담배 개비를 피워대던 다다미방이 따뜻하게 회상된다. 이 동네는 오래전에 헐리고 아주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압축성장’ 속의 이같이 급속한 ‘과거 상실’이 안타까운 가운데 그래도 문학관이나 예술가의 생가들이 복원되거나 기념되는 것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늘어난 부에 더 보태고 싶은 문화적 취향 덕분이기도 하고 지자체의 활발한 성과 지향의 사업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곳곳에 넉넉한 문화공간의 건립과 확충에 이어 작가와 시인, 화가와 음악가의 집들이 족출한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여행에 게으른 나도 몇 곳 예술가의 집을 구경했는데 내게 진한 인상으로 남은 곳이 진도의 허소치 가택인 운림산방과 전남 장흥의 이청준 생가였다. 허씨 집안의 대를 잇는 동양화 명문의 전통을 지켜주는 운림산방은 그 넓고 고아한 한옥 주택에 후손 화가들과 함께 남긴 소장 작품들이 모여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높은 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지역 관광 명소가 되고 있는 이 산방과는 달리 이청준 생가는 허름한 시골집에 팻말이 붙은 것 외에는 모두 작가가 살던 옛집 그대로이고 그 안은 생전의 사진과 가구만 치장하고 있었다. 그 달라짐 없는 모습에서 오히려 이청준의 문학이 살갑게 다가왔고 집 앞에서 시작되는 옛길이 그의 명작 <눈길>의 안타까운 모자간의 애정을 되살려주고 있었다.

외국 여행 중에 더러 그 지역의 문인과 예술가들 집을 구경하는데, 그 대부분은 크든 작든 생전의 그 예술가들의 삶을 그대로 보존해주고 있었다. 내가 처음 서구 여행으로 구경한 스톡홀름에서 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집을 찾았을 때 의외였던 것은 그의 기념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웃 여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한 칸이었다. 그 집에는 그가 쓴 가구와 책상, 그가 생전에 읽던 책을 꽂은 책장과 그의 운명 시간에 시침이 멈춘 시계뿐이었다. 위고의 집이나 베토벤 생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한용운이나 서정주의 생가처럼 복원하면서 넓힌 건물이 아니었고 옛날 쓰고 보던 것들 말고는 새로 짓고 만든 것들은 없었다. 예술가들의 옛집에서 감동받는 것은 그의 때가 묻은 물건들과 그 아우라 때문이며 그를 기념하는 새 건물이나 모뉘망(기념건축물)은 또 다른 것이다. 외국 예술가들이 사후에 받는 예우가 더 정중하고 보수적인 것은 예술가 당대의 생활 풍경, 그의 실제 삶과 사연들이 품은 아우라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리라. 우리 예술가들의 복원된 집들은 실물보다 크고 멋진 대신 실감을 잃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경리의 ‘토지공원’은 깊이 항의하고 싶은 작품이다. 박경리 선생은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살 집을 마련하신 후 손수 넓은 마당을 다듬고 무거운 돌을 옮겨 길을 만들며 작은 연못도 파 물고기를 기르셨다. <토지>를 쓰다가 지치거나 막히면, 호미로 마당길을 내고 잔디와 나무를 심는 수고를 하며 그 육체노동을 통해 정신의 피로를 풀고 상상력의 새 길을 텄다고, 그 노역을 걱정하는 내게 설명하셨다. 박 선생 작고하신 후 자치단체는 그 댁을 기념공원으로 만들면서 그 뜰의 돌들을 치우고 새로 흙을 쌓아 축소판 평사리마을로 바꾸었다. 그래서 작품 <토지>의 공간은 작게나마 재구성되었지만, 박 선생님이 다정한 손길과 거친 숨결로 다듬은 마당과 돌길, 나무와 잔디는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작가의 정신과 정서의 훈기가 어린 삶의 자리, 창작의 산실로 묵념케 하는 곳이 아니라 이름만 사칭한 관광 아바타가 된 것이다.

이쯤 이르니 안타까운 걱정 하나가 떠오른다. 서울 명륜동 골목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한옥이다. 스물몇 평에 지나지 않는 허름한 집인데 여기서 한국 아동문학을 일으킨 마해송 선생과 우리 현대무용을 창시한 부인 박외선 선생, 재미 의사이면서 한사코 시인이기를 고집하여 지금도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는 아들 종기가 해방 후 20여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주변이 모두 연립주택으로 바뀐 가운데 이 낡은 집만은 천운으로 옛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대학 시절 종기의 방에서 좁은 마당 맞은편 건넛방의 마 선생님이 작은 반상 앞에서 원고를 쓰시던 단정한 자세를 훔쳐보기도 한 이 작은 집이야말로 우리 아동문학, 무용예술, 시문학이 어울린, 초라하지만 아름다운 ‘예술가의 집’이다. 그 연고가 아까워 10년 전쯤 알아보니, 집이 너무 작고 볼품없어 시의 보존 지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중섭이 몇 달 살던 제주 서귀포의 작은 셋방이 보여준 그의 빈곤 속에서 그의 창작들이 피어난 것에 대한 내 뜨거운 감동은 서울시 관계자들의 문화적 안목과 달랐던가 보다.

우리 예술과 예술가의 문화적 감수성이 오히려 작고 가난한 풍경 속에서 열려 자라났고, 그렇기에 그 볼품없이 허름한 것들에 대한 예우는 보다 정중하고 엄숙해야 할 것이다. 전후의 그 황량한 자리에서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고 격렬하면서도 섬세한 예술의 창조력이 꽃핀 때문이다.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은 디지털 미학이 자랑하는 예술작품의 “매끄러움의 긍정성”을 비판하며 “예술의 상처인 부정성”과 그 “드러냄과 숨김의 변증적 아름다움”을 그리워한다. 그가 못마땅해하는 ‘매끄러운’ 예술의 나라 미국도 콩코드의 19세기 시인, 예술가들의 집들을 옛 모습 그대로 지켜 전통의 새로움, ‘기억의 거대한 건조물’을 보존해 창작의 탯줄을 보여준다. 베냐민의 말마따나 “내면화된 현존의 모든 힘이 기억으로부터 생겨난다. 기억은 미의 정수”이다. 내가 그 낡고 작은 옛집의 기억에서 아름다움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이고 오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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