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제는 노사정(노동자·사용자·정부)의 공동 문제라는 걸 당연시하면서, 어찌하여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문제를 언론만의 문제로 여기는 걸까? 사회적 소통과 공론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도 국민과 정부는 면책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기자 수는 인구 2300명당 1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프랑스 기자 수는 우리의 4분의 1 정도라는데, 이는 우리의 언론 자유나 발전의 수준이 프랑스의 4배라는 걸 의미하는 걸까? 국회를 담당하는 출입기자는 1747명으로 의원 1명당 평균 6명꼴이다. 이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인데, 이는 그만큼 우리의 정치나 정치 저널리즘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걸 의미하는 걸까?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훨씬 넘어서 언론사들이 난립해 있는 지역들도 많은데, 이는 그만큼 우리의 지방자치가 선진적이라는 걸 의미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은 언론과 정치의 수준과 무관하게 언론사와 기자가 많은 ‘언론공화국’이며, 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김을한은 <한국신문사화>(1975)에서 “꿀 항아리에 모여드는 파리떼 모양으로 온갖 정상배와 모리배들은 한때 앞을 다투어 신문기업을 하려고 했”는데, 이는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임시 수도 부산에 가보면 거리마다 다방마다 PRESS(신문)라고 쓴 완장을 팔에 두른 사람이 무수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그간 세상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완장’의 힘에 대한 열망은 건재하다. 그 열망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자 진리라는 건 출세하고 가진 자들이 더 출세하고 갖기 위해 저지르는 각종 비리와 갑질의 홍수 사태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작태는 1890년대에 조선을 네 번이나 방문했던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탐관오리들을 가리켜 쓴 ‘면허증을 딴 흡혈귀’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말은 바로 하자. 흡혈귀는 없다. 그 어떤 비리와 갑질의 주범도 직접 그 누구의 피를 빨지는 않는다. 그들은 면허증이나 기득권을 출세와 축재의 도구로 여기는 사회적 시스템과 관행에 따라 주변의 인정과 선망을 받으며 살았을 뿐이며, 그런 삶의 문법을 좀 더 공격적으로 열심히 지켰을 뿐이다. 적당히 지키면 무사하고 철저히 지키면 탈이 나는 문법은 그대로 두고 “지나치면 안 된다”는 지혜만을 역설하는 것으론 모자란다.
흡혈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시스템과 관행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이다. 바로 여기서 언론이 문제가 된다. 그런 무감각은 법과 정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소통과 공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법과 정책을 요구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법과 정책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겉으로 불거진 문제만 다루도록 요구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의 번성이 단지 ‘완장’의 힘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면, 소통과 공론은 뒷전으로 밀리고 만다. 모든 법과 정책의 문제가 사고가 터졌을 때에 한해서 비로소 집중적인 보도와 논평의 대상이 되는 ‘뒷북치기 저널리즘’이나 ‘하이에나 저널리즘’으론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우리 사회에 대한 좌절감만 증폭시킨다.
언론사와 기자의 수가 많은 만큼 보도와 논평의 다양성이 실현된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그게 아니다. 지금 언론은 획일성을 추구하는 ‘똑같아지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당파성을 드러내는 데엔 공격적이지만 그마저 ‘우리 대 그들’이라고 하는 틀에 박힌 공식에만 충실할 뿐이다. “지금 이대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은 누구나 다 갖고 있지만, 이는 당장 눈앞에 닥친 경제적 생존이라는 위기의식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런데 흥미롭고도 놀라운 건 이 문제가 오직 언론만의 문제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문제는 노사정(노동자·사용자·정부)의 공동 문제라는 걸 당연시하면서, 어찌하여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문제를 언론만의 문제로 여기는 걸까? 사회적 소통과 공론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도 국민과 정부는 면책될 수 있단 말인가?
언론이 그 어떤 혁신을 추진한다 해도 국민이 아무런 가치 판단도 없이 언론을 공산품처럼 대하고 정부가 언론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언론의 정상화 없인 민주주의의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이른바 언국정(언론·국민·정부)이라고 하는 상호 관계 속에서 언론의 문제를 봐야 한다. ‘면허증을 딴 흡혈귀’의 예방과 퇴치를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 모두 언국정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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