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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박민희

등록 2016-06-15 16:34수정 2016-06-15 20:33

“오늘은 우리의 친구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들에게 특히 가슴 아픈 날입니다. 총격범은 사람들이 친구와 함께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살아가기 위해 찾는 나이트클럽을 노렸습니다. (…) 이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이며 평등과 존엄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번쩍 깨닫게 합니다.”12일 49명의 목숨을 앗아간 올랜도 펄스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테러 직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런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말 오랜만에 국내 공식 석상에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국회에서 이런 연설을 하면 어떨지 부질없는 상상을 해봤다. “우리의 여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특히 가슴 아픈 날들입니다. 범인은 무고한 젊은이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했고, 라면도 제때 먹지 못하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젊은이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위험의 외주화’ 구조에 희생됐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27분38초 연설 동안 박 대통령은 구조개혁과 파견노동 확대, 제2의 중동붐, 새마을운동, 한류와 북핵까지 언급했지만, 강남역에서 숨져간 23살 여성,구의역 19살 김군의 죽음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올랜도 테러에 대해서는 14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위로전을 보내 애도했다고 한다.

헬조선이란 말마저 진부해져버린 현실에서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을 덜어줄 정치·사회적 장치의 마비와 붕괴다. 무고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끊이지 않지만 책임자들, 권력자들은 차갑게 침묵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지난 한달, 우리 사회의 아래에서 뭔가가 변했다. 막막함을 뚫고 수많은 애도와 공감이 손을 맞잡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만있지 않겠다, 우리가 나서겠다고 다짐하는 목소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너의 죽음에 네 탓은 없지만 그동안 침묵했던 내 탓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고 미안해. 만약 나라도 목소리를 내었다면 지금 넌 살아 있을까. 이제는 침묵하지 않을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그녀는 또다른 나입니다”(강남역) “사람보다 돈이 먼저… 언제까지 이런 억울한 희생을 지켜봐야 하나요?” “당신이 떠난 이 자리에는 여전히 열차가 지나갑니다. … 저 역시 하청업무를 하는 노동자입니다. 외롭지 않게 억울하지 않게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겠습니다.”(구의역)

전남 신안군 섬에서 교사를 성폭행한 남성들은 피해자가 두려움이나 수치심 때문에 신고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이번엔 침착하게 증거를 보전하고 곧바로 신고한 피해자의 용기가 있었다. 성폭력의 본질을 은폐하고 ‘전라도 ×들’ ‘‘섬 ×들’ 등 지역 혐오 담론을 퍼뜨리려는 증오의 세력을 넘어서는 현명한 여론의 힘도 나타났다. 권력과 돈을 움켜쥔 이들은 뒤에 숨은 채 약자, 소외된 이들끼리 서로 증오하고 혐오하는 구조를 부추겨 교묘히 기득권을 유지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런 술수에 속지 말자고 눈뜨기 시작한다. 힘들어하는 이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려는 정치, 국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이젠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오늘도 구의역 9-4 플랫폼에는 무심히 열차가 들어온다. 사고 현장을 중심으로 7개의 안전문과 맞은편 창가와 벽까지 퍼져나간 포스트잇과 이젠 물기를 잃고 말라가는 국화들 사이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거기 쓰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 열차가 진입하오니…’ 안전선으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한번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제 강남역으로 갑니다. 아무도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나,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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