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모든 국민에게 매달 1인당 300만원씩 주는 기본소득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국내 언론이 꽤 크게 보도했다. 예전처럼 ‘봐라, 선진국도 퍼주기 복지 반대하지 않냐’는 식의 구닥다리 보도보단, ‘왜 이런 방안이 나왔고, 왜 반대했을까’라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보도가 주를 이뤘다. 그만큼 달라졌다.
스위스의 반대 이유에는 재정소요와 증세 부담, 기존 복지정책 훼손 등 좌·우파적 우려가 섞여 있고, ‘삶의 질 향상과 인간의 존엄성에 도움이 되나’라는 철학적 고찰까지 포함돼 있다. 스위스는 실직해도 2년간 기존 월급만큼을 받는다. 일반가계 전체 소득 중 20%가 사회복지 재정에서 나온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만8179달러로 세계 2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삶의 질 순위는 4위다. 실업률도 3.6%로 유럽에선 매우 양호하다. 일반국민들은 기본소득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을 주창한 단체는 ‘기본소득이 있으면 개인이 먹고사는 것을 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인간의 자유와 선택의 폭을 넓혀 삶의 질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도 “사회발전이란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넓어짐을 뜻한다. 풍요로움은 그다음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은 ‘선택’이 아니라, ‘공포’가 움직이는 사회다. 정해진 레일 위에서 정해진 시간에 역을 통과하지 못하면 생존 자체를 위협받기에 먼저 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엄청나게 일하고, 그러면서도 모든 자영업자는 파산, 모든 월급쟁이는 실업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다. 직장으로서 한겨레신문사의 경우, 최소한 고용안정 측면에선 양호한 편이다. 그럼에도 한 후배는 ‘회사에서 잘리는’ 꿈을 꿨다고 한다. 일이라는 것이 소득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기본소득 제도가 있다면 그 후배가 그런 꿈을 안 꾸지 않았을까? 그리고 공포에서 자유롭다면 타인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논의는 이제 그 첫발을 뗐다. 우리 사회가 정체됐고, 계층 사다리도 끊어졌다 한다. 경제가 저성장 체제로 들어가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웃돈다. <21세기 자본>에서 토마 피케티는 “성장률이 1%로 떨어지면 자본총량은 소득의 10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상속 등 절로 얻은 자산이 근로소득을 능가함을 뜻하고, 이는 사회 전반에 좌절감을 심어줄 수 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사고가 퍼지는 곳에 삶이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달리고 달리고 달려야’ 하는 러닝머신 위 불안한 질주일 수 있다.
미국 사회에서 지난 1977년에서 2007년까지 30년간 상위 1%는 국민소득 증가분의 60%를 흡수한 반면, 하위 90%는 소득증가율이 연 0.5% 미만에 그쳤다. 기본소득 논의는 이런 흐름을 벗어나고자 하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을 확보하려면 평균소득자들의 경우, 최소한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할 것이다. 반론은 무한하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왜 더 인간다운 삶을 사는 스위스에서 나온 걸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마틴 셀리그먼 교수(심리학)는 개들을 상대로 가벼운 전기실험을 했다. 첫번째 그룹은 개들이 패널을 스스로 밀면 전기쇼크가 멈추도록 했고, 두번째 그룹은 그런 장치를 두지 않았다. 개들을 낮은 울타리의 우리에 같이 넣고 다시 실험했는데, 첫번째 그룹은 쇼크가 오자 우리를 넘어갔다. 두번째 그룹은 쇼크가 와도 몸을 웅크리고 견뎌냈다. 우리를 넘어갈 생각은 않은 채 짖기만 했다.
권태호 국제에디터 ho@hani.co.kr
권태호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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