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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죽음을 조롱하는 정치세력 / 박용현

등록 2016-05-25 20:31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뒤 곳곳에 추모의 공간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곳에 탈을 쓰고 나타나거나 한밤중에 추모 포스트잇을 훼손하며 약자의 죽음과 그에 대한 슬픔을 모독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우리 사회의 병적 징후를 대표하는 극소수 세력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런 세력구도가 바뀐다. 평범한 시민, 무구한 아이들, 삶의 벼랑에 내몰린 약자들의 수많은 죽음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정치세력이 이른바 주류를 이뤘다. 그들은 추모의 시공간에서 한껏 죽음을 조롱한 뒤 탈을 벗고는 환히 웃으며 ‘민생’을 외쳤다. 그렇게 집권을 하고 제1당을 유지해왔다. 이 의아한 현상은 당혹스러우리만큼 견고하게 지속됐다.

집권세력은 세월호에서 숨져간 아이들과 유가족을 조롱하고 막말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상규명 요구에 “세금이 많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굳어버린 심장으로 뭇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그려볼 수나 있을까. 희생된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당도했을 나이, 스무살 청년들의 고단한 민생을 진정 아파할 줄이나 알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는 “교통사고와 형평성” 운운하며 가해 기업과 직접 싸우라고 했다. 그런 수준의 공감 능력으로 기업의 고삐 풀린 이윤추구에 희생당하는 수많은 ‘을’들의 민생을 챙길 수 있을까. 농민들 먹고살게 좀 해달라고 시위하던 백남기씨를 물대포로 혼수상태에 빠뜨리고는 사죄는커녕 험담을 했다. 그러면서 농민들 민생을 헤아리겠다고 한다. 직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고 기계에 빨려들어 죽어간 노동자들을 향해 제대로 조사(弔辭) 한번 내놓지 않았다. 그러고도 무한경쟁에 내몰려 픽픽 쓰러져가는 직장인들에게 ‘민생경제를 살리겠다’며 지지를 요구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경찰이 “혐오범죄는 없다. 묻지마 살인이다”라고 규정하는 걸 보면 피해 여성에 대해 집권세력이 어떤 추모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온갖 여성 비하와 성추문으로 얼룩진 새누리당의 과거를 돌아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그러면서 양성평등 운운하는 정책은 또 내놓을 것이다. 2009년 세입자들의 농성을 과잉진압해 6명의 생명을 앗아간 용산참사. 7년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책임자를 총선에 공천함으로써 지독한 조롱을 날렸다. 군인들이 그 주인인 시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어떤가. 박 대통령은 3년째 기념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노래 한 곡 제창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보훈처 간부라는 자는 유가족단체 회원을 성희롱하기까지 했다.

패악이라고밖에 일컬을 수 없는 집권세력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슬픔을 느끼는 죽음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저 죽음들이 상징하는 바 우리 사회의 대다수 힘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삶들이 그들에겐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면, 그들이 떠드는 민생 정치의 수혜자는 얼마나 축복받은 소수에 그친다는 말인가. 민생은 공동체의 성원들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요, 그 살아감을 부축하는 일이다. 그게 어떤 이유로든 실패했을 때 누군가에게 때아닌 죽음이 찾아든다. 그러니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거꾸로 삶을 대하는 진정성의 가늠자인 것이다.

박용현 정치 에디터
박용현 정치 에디터
애도할 줄 모르는 정치세력이 득세하는 것은 민주국가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4·13 총선 결과는 그런 시대가 종막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희망의 조종과도 같았다. 총선 참패 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다시 민생이란 구호 뒤에 숨었고 내년 대선 때도 그럴 테지만, 그 외침이 울림을 주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저 죽음들 앞에 다시 나아가 깊이 고개 숙이는 일이다.

박용현 정치 에디터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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