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라고 적힌 하얀색 패널은 지금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 관계자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2013년 2월22일 청와대 근처 한국금융연수원에 꾸려진 인수위가 문을 닫던 날 브리핑룸 단상에 붙어 있던 이 패널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아직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표 나기 전인지라 불안한 마음 달래는 ‘정표’로 삼고 싶었을지 모른다. 당직자들에게 떼어올 것을 지시한 윤 전 대변인은 소주 몇 잔 걸친 뒤 패널을 ‘그랩’,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2. 대선자금 수사에서 차떼기를 통한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들통난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까지 맞으며 휘청였다. 2004년 3월 박근혜 대표는 400억원짜리 서울 여의도 당사를 팔고 여의도 중소기업종합전시장 흙바닥에 천막을 쳤다. 천막 당사로 이름붙여진 이곳에서 풍찬노숙 끝에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얻으며 기사회생했다. 84일 만에 천막을 걷고 강서구 염창동 당사로 이사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의 ‘역사’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직자와 기자들만으로도 벅찬 천막 당사로 이사하며 오래된 기록과 민감한 내용들이 적힌 서류들은 양천 소각장으로 보내져 불살라졌다. 가뜩이나 공식 기록이 부족한 한국 정당사에서 보수 여당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자료는 그만큼 줄어들게 됐다.
#3. 새누리당의 20대 총선 공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회의록이 없다고 한다. 심사장 밖에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쏟아낸 모진 말들만이 둥둥 떠다닌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외부 공천관리위원들이 어떻게 선임됐는지도 미스터리다. 공천 심사 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든 여의도연구원 여론조사 유출 사건의 검찰 수사자료만이 공식 기록으로 남을 처지다. 18대 총선까지만 해도 당에서 공천 심사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공개는 안 해도 적어두기는 했다는 것이다. 18·19대 공천 과정을 잘 아는 새누리당 한 의원은 “19대 총선부터 공천 회의록이 사라졌다”고 했다. 19대 총선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친박계가 주도했다.
#4. “국민이 우리에게 121석이라는 큰 지지를 보내준 것은 거듭나서 잘하라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 마지막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한나라당은) 역사에서 소멸할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17대 총선에서 참패를 면한 뒤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두 번 온다. 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던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었다. 당 쇄신이 없다면 ‘영남 자민련’으로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갔으면서 지금 와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 대통령이란 자리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있는 자리가 아니다.” 2006년 12월, 임기 1년을 남겨둔 노무현 대통령에게 박근혜 의원이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은 10년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전혀 기억 못하는 것 같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기록은 폐허다.
#5. 2007년부터 쓰고 있는 지금의 새누리당 당사 5층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당직자들도 잘 모르는 이곳에는 천막 당사로 떠날 때, 그리고 천막 당사를 떠날 때 피란지의 상징이었던 묵직한 한나라당 현판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일종의 수장고인 셈이다. 4·13 총선 참패 뒤 당내에서는 “천막 당사 정신을 되새기자”는 말이 쏟아지고 있다. 이참에 수장고라도 열어 유물 전시회라도 해보자. 12년 전 흰 장갑 끼고 한나라당 현판을 날랐던 박 대통령은 필참이다.
김남일 정치팀 기자 namfic@hani.co.kr
김남일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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