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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자소서는 어떻게 ‘자소설’이 되는가 / 문강형준

등록 2016-04-29 19:29수정 2016-04-29 21:21

오늘도 취준생들은 ‘자소서’를 쓴다. 자소서는 ‘자기소개서’의 줄임말로, 기업에 원서를 낼 때 거의 예외 없이 제출하는 서류이다. 명칭 그대로 자소서는 자기가 살아온 경험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이 회사에 채용되어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는 글이다. 하지만 자소서에 쓰는 모든 소개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궁극적으로 채용담당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소서를 쓰는 이는 모든 항목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최대한 과장해야 한다. ‘가장 어려웠던 일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희생함으로써 협력을 이끌어낸 경험’에 대해 쓸 때, 지원자는 최근 4~5년의 대학생활 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복기해서 아무리 작은 경험이라도 그 속에서 ‘어려움’ ‘극복’ ‘목표 달성’ ‘희생’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내야 한다. 당연히 경험은 과장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소설’처럼 ‘있을 법한 허구’가 된다. 모두가 소설을 쓴다면, 그중 가장 극적이고 재밌는 소설을 쓴 이가 서류전형을 통과할 공산이 크다. 자소서 쓰기는 우리 시대의 청년문학이자, 기업이 주관하는 신춘문예다.

자소서가 ‘자소설’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자기소개’의 독자성과 창의성을 결여하고, 기업이 제시하는 항목에 자기를 맞추는 글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초월해 자소서 항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은 뭘까. ‘열정, 극복, 도전, 끈기, 성과, 창의, 문제해결, 비전, 노력, 희생, 진지함, 헌신, 감동’ 등이다. 이 단어들은 기업이 찾는 인재가 거의 ‘슈퍼히어로’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평범한 대학생들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취준생들은 자기 삶의 경험들을 이러한 단어들에 맞춰서 재배치해야만 한다. 이제 경험을 통해 가치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자소서에서 요구하는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경험을 조직하는 게 최선이다. 대학생활에서 자소서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소서를 위해 대학생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소서의 기능은 그래서 단순히 기업에 ‘자기소개’를 하는 게 아니다. 자소서는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 기업의 인재상에 맞추어 ‘자기’를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9~10년의 자기 인생을 기업이 요구하는 가치에 따라 조직하는 일이다. 청년실업률이 역대급으로 높은 오늘날, 자소서는 청년들이 ‘자기’의 삶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지침서다. 이것은 기업이 운영하는 ‘고해성사’다. 그런 의미에서 자소서는 개인을 권력의 입맛에 맞춰 하나의 ‘주체’로 만드는 체계, 곧 푸코가 ‘장치’(dispositif)라고 불렀던 것의 대표적인 한국적 사례가 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학생부’가 중고등학생의 삶을 주조한다면, 자소서는 대학생의 삶을 주조하는 ‘주체화 장치’다. 자본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청년의 삶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렇게 생산되는 ‘자기’란 ‘스스로를 인적자본으로 바라보고 투자 대비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자기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인간’, 곧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그의 삶은 완벽한 자유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본에 구속된 인간으로 스스로를 관리한다. 오늘날 정치는 국회나 청와대에 있다기보다, 기업의 자소서가 만들어내는 청년들의 삶 속에 있다. ‘삶 정치’란 이런 것이다.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청년에게 있다? 아니다. 그것은 청년의 삶을 생산해내는 자본에게 있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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