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투수 타다노 카즈히토가 이퍼스를 던지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이영상을 세 차례나 받은 클레이턴 커쇼(28·LA 다저스)가 최근 경기에서 시속 46마일(74㎞)의 아주 느린 공을 던졌다. 그의 속구 평균 속도가 시속 92.4마일(148.7㎞)이고 가장 느린 변화구(커브) 평균 속도 또한 시속 72.4마일(116.5㎞)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의외이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볼로 선언됐지만,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언론들은 커쇼의 공을 ‘이퍼스’라고 소개했다. 이퍼스는 큰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아주 느린 공을 말한다. 높게는 지상에서 6m 이상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공이어서 ‘스페이스(우주)볼’, ‘문(달)볼’, ‘벌룬(풍선)볼’ 등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커쇼의 공은 단순히 포수와의 사인 잘못 때문에 실수로 던진 공으로 밝혀졌다.
이퍼스는 립 수얼(Rip Sewell. 피츠버그 파이리츠)이 위기에서 만들어낸 구종이다. 1941년 12월 수얼은 친구와 사냥을 나갔다가 총기 사고로 오른 엄지발가락을 다쳤다. 공을 던질 때 축이 되는 오른발이 치료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타자를 상대할 다른 구종이 필요했다. 이퍼스를 처음 접한 타자들은 장난과도 같은 공의 궤적과 구속에 “이것은 공도 아니다”라는 혹평을 가했으나 수얼은 이 공으로 1943년과 1944년에 2년 연속 21승을 거뒀다. 이퍼스를 던지기 전 그의 시즌 최다승은 16승(1940년)이었다.
‘이퍼스’는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라는 뜻의 히브리어 이페스(efes)에서 차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공 같지도 않은 공’이지만 한 투수의 벼랑 끝 승부에서 탄생한 이퍼스는 지금도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할 때마다 타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 마구(악마의 공)로 통용되고 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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