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 사회는 호남의 정치적 욕망을 선거를 통해 표출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광주 학살’의 가해 진영은 호남을 희생양 삼아 지배했고, 민주진영은 그 희생을 순교의 형태로 신성화시켜 이용했다.” “철저히 세속적인 욕망이 표출돼야 할 정치(선거)가 신성화됨으로써 호남의 욕망은 자의반 타의반 거세된 것이다.”(김욱 <아주 낯선 상식>)
무섭다. 국민의당이 호남 압승을 기반으로 제3당으로 올라섰다. 호남에서의 승리는 이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밀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김욱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호남 유권자들이 친노무현 세력의 위선적 영남패권주의를 물리치고 획득한 성과로 볼 수 있겠다. 정치적 선택권이 생겼다는 것은 발전이다. 안철수 대표는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 겁먹고, 만년 야당, 만년 2등에 안주하는 무능한 야당을 대체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권을 교체할 것이다”라고 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진 야권의 앞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재편이 가능할까?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금 야권의 두 축은 호남이라는 ‘지역’과 20대에서 50대 초반까지의 ‘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세대’는 쉽게 말해 ‘비호남 야권’이다. 어느 쪽이 더 클까? ‘비호남 야권’이 더 크다. 선거 결과가 그렇다.
“이제 민주 진보 세력의 가장 큰 힘은 노무현을 기억하는 사람들인데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이 노무현을 파상공격한다고 해서 그를 멀리하면 보수 내지 중도가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사고다. 지난 시기 호남을 빼고 민주 진보 진영을 생각할 수 없듯이 지금은 노무현을 빼고 민주 진보 진영을 생각하기 힘들다.”(유창오 <정치의 귀환>) 안철수 대표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문재인 전 대표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새누리당이라고 배척하는 ‘낡은 진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선거 전날 광주에 가서 “국민의당에 투표하는 것은 새누리를 돕는 것”이라고 했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도 안철수 대표를 향해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당분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야권 재편은 고사하고 대화도 어렵다고 봐야 한다. 기득권 세력은 두 집단을 끊임없이 이간할 것이다.
국민의당 사정도 복잡하다. 야권 재편보다는 당장 의원총회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낡은 진보 청산’을 외치는 안 대표와 진보 성향의 천정배·정동영·박지원 등 호남 정치인들은 정책노선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호남을 근거지로 한 제3의 정치세력 출현이 사실 처음은 아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광주와 전남은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선택했다. 광주에서는 시장과 구청장 5석을 몽땅 민주당이 차지했다. 그 민주당은 2007년 대선후보로 이인제를 내세웠다. 이인제 후보는 16만표(0.7%)를 득표했다.
어쨌든 야권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는 한 정권교체는 불가능하다. 기득권 세력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정치의 귀신들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4·13에서 일격을 당했지만 머지않아 전열을 정비하고 대선 준비에 나설 것이다.
선거는 끝났다. 호남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불어민주당 혼내줬다고 환호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세속화 다음 단계는 과연 무엇일까. 지혜가 필요하다. 1996년 4·11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차지했다. 야권의 앞날은 캄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0석을 차지한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에 손을 내밀었다. 디제이피 연합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꼭 20년 전의 일이다. 지금 ‘호남’과 ‘비호남 야권’의 거리는 20년 전 국민회의와 자민련보다 가깝다. 얼마든지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 서로를 새누리당보다 더 미워해선 안 된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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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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