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린지 그레이엄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신임 대법관 인준을 요청하는 전화였다. 오바마는 지난달 메릭 갈런드 워싱턴 연방항소법원장을 신임 대법관으로 지명했으나, 공화당은 “다음 대통령이 새 대법관을 뽑아야 한다”며 인준 절차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오바마의 말을 한참 들은 그레이엄은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갈런드가 좋은 사람이란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음 대통령이 할 일입니다”라며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바마는 제프 플레이크 공화당 상원의원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균형감 있는 분이라 생각해 전화를 걸었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플레이크도 “대통령님, 대통령님도 (야당) 의원이라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대법관 인준 소관 상임위원회인 상원 법사위에 소속된 공화당 의원 11명 중 8명이 ‘대통령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은 모두 퇴짜 맞았다. 다만 인준을 반대하는 그레이엄 의원이 대통령 전화를 받은 뒤 “(갈런드 지명자를) 만나는 보겠다”고 말한 게 그나마 소득이다.
야심차게 시도한 오바마 케어에 대한 불만, 공화당의 집요한 공격 등으로 2년 전 중간선거 때만 해도 상·하원 모두 여소야대가 된 오바마 행정부가 임기를 몇 달 남겨두고도 레임덕에 빠지기보단 50%를 웃도는 지지율을 바탕으로 여러 정책을 두루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대형마트 진열장에서 ‘블루문’ 맥주를 보면 2009년 ‘백악관 맥주 회동’이 떠오른다. 자신의 집에 들어가던 흑인 교수를 도둑으로 오인해 수갑을 채웠다가 ‘인종차별’로 몰렸던 백인 경찰. 오바마는 그 경찰을 비난했다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는 항의에, 행정부 수장으로서 곧바로 사과했다. 오바마는 사과를 받으면서 “맥주나 한잔 했으면 한다”는 경찰 말을 낚아채, 백악관 잔디밭에서 경찰(블루문), 흑인 교수(레드 스트라이프), 오바마(버드 라이트)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맥주를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다. ‘쇼’다. 하지만 그게 정치다.
오바마가 공화당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 때, 그들이 대통령 전화에 감복해 당론을 어기고 돌아서리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과가 있든 없든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맡은 자의 ‘본분’이다.
국제 에디터로 옮긴 지 보름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대사관 관계자가 방문했고, 중국 대사관이 초청 행사를 열었고, 이란 대사가 간담회를 연다고 알려왔다. 회사를 찾은 이스라엘 관계자는 좀체 납득하지 않는 내게 이스라엘이 얼마나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인지 열성적으로 설파했다. 중국 대사관 관계자는 언론통제를 지적하는 한국 기자들에게 “많이 달라졌다. 다만 해당국의 사정을 이해해달라. 중국은 아직 개도국이다”라고 항변하면서 “자주 교류를 가집시다”라고 했다. 내각책임제여서 대통령제와 다르긴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의회에 참석해 야당 의원들의 거센 공격에 맨몸으로 맞서 온종일 답변하고, 답변할 때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은 총선 전날도 ‘국회 심판론’을 꺼냈는데, 늘 그렇듯 ‘만만한’ 국무회의에서 했다. ‘국회 심판론’을 말하려거든 국회에서 하든지,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든지, 기자회견을 하든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국무위원들, 청와대 비서관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똑같은 얘기를 듣고 또 듣고 해야 하나?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달라져도 되지 않겠는가?
(…) 내 말에 혼자 민망하다.
권태호 국제 에디터 ho@hani.co.kr
권태호 국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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