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거의 배경에는 그 시대 상황을 압축하는 열쇳말이 있다. 드문드문 있었던 1980년대 선거에는 ‘민주화’였고, 1990년대엔 ‘세계화’가 더해졌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개혁’이 득세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복지’가 시대정신이 됐다. 최근 몇 차례 선거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기가 쉽지 않지만, 내일 치러지는 20대 총선에선 ‘헬조선’ 정도가 그 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선거에서 각 정당은 자신의 주장을 슬로건으로 요약해 표현한다. 슬로건(slogan)은 중세 유럽 때 밤중이나 전시에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암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해하기 쉽고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 선거에서는 여기에다 호감을 통한 확장력이 더해져야 좋은 슬로건이 된다. 그래야 이른바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8년 선거에서 내세운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Yes, we can.)라는 슬로건이 좋은 사례다. 그는 당시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층 등을 투표장에 대거 불러내면서 압승했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슬로건인 ‘우리를 위한 싸움’(Fighting for us)에는 그런 동력이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최악의 후보로 평가받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슬로건으로서는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민주당 버니 샌더스 후보의 ‘뜨거운 변화를 느껴라’(Feel the Burn)도 괜찮지만, 그의 돌풍은 일정한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은 ‘뛰어라 국회야’를, 제1·2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각각 ‘문제는 경제다’와 ‘문제는 정치다’를 주된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모두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듯한데,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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