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휘틀리 감독의 영화 <하이-라이즈>는 1975년에 발표된 제임스 그레이엄(J. G.) 밸러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인 ‘하이-라이즈’(high-rise)는 초고층 빌딩을 뜻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건축물인 영화 속 고층 아파트는 수영장, 마트, 학교 등을 갖춘 고급 아파트다. 주인공인 닥터 랭은 25층으로 이사 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이웃들은 파티를 연다. 자족적인 이 완벽한 아파트는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전, 소음, 아이들, 엘리베이터 고장 등 사소한 문제들이 주민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층수에 따른 계급화로 나타나는데, 저층-중층-고층은 각각 서민-중산층-부유층을 표상한다. 부유층은 서민들을 천박하게 여기고, 서민들은 부유층에 대한 분노를 키운다. 중간에 있는 닥터 랭은 둘 사이를 오간다. 균열은 터지고, 최첨단 고급 아파트는 전쟁터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원초적인 밀림처럼 변한다.
원작 소설의 주된 테마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이다. 밸러드는 외부와는 동떨어진 평온하지만 황량한 중산층 타운을 배경으로 삼아 그곳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섹스와 폭력을 다양하게 그린다. 중산층의 내부 붕괴를 그리는 작품은 흔하지만, 밸러드의 독창성은 폭력이 역으로 평온을 가능케 하는 필수요소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폭력은 인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은 풍요로운 부와 최첨단의 기술을 가진 서구 세계마저도 영원히 제거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의 문명이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취약한 것에 불과하다.
40년 만에 영화화된 <하이-라이즈>는 소설보다 더 화려하지만 덜 명료하다. 소설에서 보이는 계급 간의 갈등과 하층민의 상승욕망이 영화에서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유토피아의 건설이 어떻게 광기의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지를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낸다. 하층민과 부자가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은 오지 않으며, 중산층(닥터 랭)은 그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해서 살아남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영화는 죽음을 부르는 남성적 폭력과 삶을 꾸리는 여성적 돌봄을 대비시키면서, 계급갈등이 남성의 도태와 여성의 번성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상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만화경으로 ‘미래’를 보는 어린 토비가 듣는 라디오를 통해 ‘자본주의 외에 다른 경제체제는 없음’을 설파하는 마거릿 대처의 목소리를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 전체가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기획의 예견된 실패에 대한 알레고리였음을 드러낸다.
<하이-라이즈>는 여러모로 한국 사회를 환기시킨다. 부자-빈자, 남자-여자, 서울-지방, 우파-좌파, 정규직-비정규직, 기성세대-청년세대 등 한국 사회의 ‘격차’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갈등은 날로 깊어가지만, 드라마와 예능에서부터 다가오는 총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희망, 경쟁, 화합, 미래, 발전과 같은 ‘착한’ 말만 무성하다. 전자가 현실이라면 후자는 환상이다. 이 착한 말들은 일상에서 겪는 노골적인 폭력의 만연을 잠시 가릴 수는 있지만, 현실의 폭력을 결코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밸러드의 통찰에 기대자면, 착한 말들은 노골적인 폭력으로 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둘은 한 몸통을 가진 샴쌍둥이다. 착한 말로 가득한 총선 포스터와 무릎 꿇고 읍소하는 후보들에게서 내가 보는 것은 다시 4년 연장될 끔찍한 폭력의 세상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