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바보야, 문제는 학부모야

등록 2016-04-03 19:04수정 2016-04-04 11:13

나는 학력고사 세대다. 340점 만점에 필기 320점, 체력장 20점으로 이뤄졌던 시험. 해마다 학력고사가 끝나면 일제히 조간에 표가 실리며 ‘서울대 법대 ○○○점, 물리학과 ○○○점 예상’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교실에는 전지 크기의 배치표가 돌아다녔다. 전기에 떨어지면 후기, 그다음 전문대로 이어지는 코스. 학력고사가 치러진 1982학년도에서 1993학년도까지는 한국 대입 역사상 가장 단순한 입시 시기로 불린다.

대학생과 고등학교 2학년 두 아들을 두고 있는 학부모지만, 부끄럽게도 난 학생부(학교생활기록부)가 어떻게 생긴지 잘 몰랐다. 학생부에 10가지 항목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게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독서활동, 행동발달 및 종합의견이라는 것도 몰랐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담임 의견이 상투적인 표현의 서너줄을 넘어가기 드물던 시대에 자라난 탓일까. 교사들이 3년에 걸친 아이의 성장을 꼼꼼히 지켜보고 몇장에 걸쳐 공정하게 적어줄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잘 안 갔다.

아이가 중학생일 때부터 ‘수행평가’를 챙겨줄 수 없었던 직장맘의 처지는 고등학교 학생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책을 다양하게 읽는 게 좋지 왜 진로와 관련성을 따지는지도, 썩 동의할 수 없었다. 봉사활동조차 엄마들이 실제 시간 대비 인정이 많이 되는 프로그램 정보를 찾아 접수해주는 모습엔 자포자기했다. 진로희망의 사유는 구체적 프로그램이나 책을 통해 꿈을 갖게 된 계기를 쓰는 게 좋다는데 그 정도로 명확한 자기 계기가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주변에는 아이의 자기소개서 작성을 맡아주겠다고 큰소리쳤다가 두손두발 다 들었다는 기자들이 적잖았다. 핵심은 비교과였다. 학생부전형과 수시를 엄두 못 낸 큰아이의 유일한 길은 수능 100% 정시뿐이었다.

지난달부터 ‘학생부의 배신-불공정입시 보고서’ 시리즈를 내보내며 가장 생생하게 와닿았던 부분이 있었다. ‘일반고에선 시도경연대회에 전교에서 겨우 1~2명이 나가고 그나마도 외부대회라 학생부에 참가경력 정도만 쓰는데, 특목고·자사고 등에선 전문가 학부모들을 쉽게 섭외해 전국대회 수준의 교내대회를 치르고 학생부에 순위까지 기록된다.’ 수십년간 글로 밥벌이해온 나도 학부모들의 경제력과 문화자본이 입시를 결정짓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전문가들, 특히 학부모들 사이 수시축소론이나 수능정시 확대론, 나아가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폐기론까지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한 학년이 1천명 넘는 고교가 수두룩하던 80년대, 매달 학교엔 1등부터 50등까지 모의고사 전교석차가 적힌 두루마리 종이가 붙곤 했다. ‘응팔’ 같은 드라마처럼 그때가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1천여명의 학생 모두가 행복하진 않았던 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일률적인 시험점수로 줄세우기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힘겹게 형성해왔다. 학종에 문제점이 있다고 쉽게 이 큰 흐름을 뒤집을 순 없는 일이다. 실제 대학들이 사실상 특목고·자사고 중심의 고교등급제를 안착시킨 것도 다름 아닌 수능정시 중심 시절이었다.

학부모들이 요구할 건 점수 중심의 단순한 입시제도로의 환원이 아니라, 학교 교육과정 변화다.
김영희 사회에디터
김영희 사회에디터
수업과 비교과 활동을 연계한 강북구 삼각산고 같은 곳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최소한 선생님보다 학원이 낫다고 수백만원짜리 패키지로 학생부 서류를 써오는 금수저 사례나, 1등급 외엔 아예 선생님이 학생부 내용을 직접 써주지 않는다는 흙수저 사례는 사라져야 한다. 데모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다.

김영희 사회 에디터 d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1.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2.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이미 예견됐던 ‘채식주의자’ 폐기 [한겨레 프리즘] 3.

이미 예견됐던 ‘채식주의자’ 폐기 [한겨레 프리즘]

훌륭한 대통령만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4.

훌륭한 대통령만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설] 배달앱 수수료 인하안, 더 이상 시간 끌어선 안 된다 5.

[사설] 배달앱 수수료 인하안, 더 이상 시간 끌어선 안 된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