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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죽음의 산들 / 서경식

등록 2016-03-31 19:40수정 2016-03-31 19:49

‘라스카사스-세풀베다 논쟁’은 500년 뒤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그는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된 보편주의를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 보편주의’ ‘새로운 보편주의’를 쌓아가려는 결의다.
나는 지금 뉴욕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코스타리카대학 초청 강연 뒤 비행기 환승과 시차조정을 겸해 뉴욕에 들렀다. 코스타리카 일정을 끝내고 지난 3월19일 이곳으로 돌아왔다. 코스타리카에서 공식 일정이 끝난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 부부는 나를 초청해 준 이 대학 최현덕 교수, 그곳에 체류 중인 이신철 교수와 함께 수도 산호세 근교의 이라수 화산을 보러 갔다.

가이드를 겸하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던 운전수가 자동차를 도로 옆에 세우더니 계곡 저편을 가리키며 “저것이 ‘죽음의 산’이다”라고 말했다. 파나마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많이 죽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주로 자메이카에서 유입된 흑인 노예들이었다. 카리브해 섬들의 기후에 적응한 그들은 한랭한 고산기후와 중노동 때문에 죽어갔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 오지에서 강제연행당해 대서양 너머 카리브해 지역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이 산지로 끌려와 죽음을 맞은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마을을 안고 있는 분지 저편에 첩첩이 이어진 산들이 보였다. 내게는 그 산들이 멀리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일본 규슈나 홋카이도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철도나 광산에서 중노동을 강요당하다 쓰러져간 조선인들의 유해가 묻힌 죽음의 산들이다. 지구 도처에 식민주의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말없이 묻혀 있는 죽음의 산들이 이어져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1주일을 보내는 사이에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입지를 굳혔다. 트럼프는 이민에 대해 과격한 비판을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인 이민에 대해 미국에 마약 밀매인이나 강간범을 보내는 것이라며 멕시코를 비난하고 있다. 멕시코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멕시코 정부와 멕시코인 이민을 겨냥한 트럼프의 공격적인 발언을 “듣기 거북한 말투”라고 비판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신중하게 투표해 달라고 촉구했다.

트럼프의 이런 발언은 내게는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부터 일본의 관민이 재일 조선인들에게 되풀이해온 배외주의를 연상시킨다. 트럼프의 일련의 배외주의 발언은 미국 내에서 비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곳에 사는 나의 젊은 벗은 수심 깊은 표정으로 만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뉴욕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온갖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이 도시를 다이내믹하게 작동시키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그 다양성을 억지로 파괴하고 단일문화 사회를 만드는 건, 보통사람들 생각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 나치스 독일이었다. 결과는 대재앙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역사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벽을 쌓아서 봉쇄하자든가,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입국을 금지하자는 게 실행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합리성이나 실현 가능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모든 것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오락이고 대중이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농담인 체하는 선동에 브레이크가 듣지 않게 될 때 파괴와 재앙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나중에 “그건 농담이었어” 하고 얘기해봤자 이미 때는 늦다.

멕시코 대통령은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이런 수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인간 사회가 경제위기 뒤에 경험했던 열악한 상황이나 문제를 이용했다며, 그것이 세계적인 대참사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와 파시즘 간의 싸움이었다는 총괄적 평가 위에 인권을 지고의 가치로 선언했다. 이후 국제사회는 실상이야 어떠하든 이념적 원칙으로서는 그 가치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삼아 공유해왔다. 멕시코 대통령이 어떤 인물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세계에서 인류가 당연한 것으로 공유해온 상식을 말했을 뿐이다. 그것을 “상식이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해야만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을 한참 쓰고 있는데 벨기에에서 또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구미 사회는 또다시 강경한 태도로 나올 것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악순환이 더욱 가속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만연한 살육이나 잔혹성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져 냉소주의(시니시즘)에 빠지는 현상이다. 지금은 나치스 독일의 잔학성·냉혈성을 열거해봤자 아무도 진심으로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나치스 패배 뒤에도 그와 다를 바 없는 잔학성·냉혈성이 세계 도처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쟁지나 전장의 무장집단만이 아니다. 구미나 일본의 배외주의자들이 이 냉소주의와 냉혈성을 증명하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국가 그라나다가 함락돼 기독교 세력의 ‘레콩키스타’(국토 재정복)가 완성됐다. 유럽의 다원적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불관용의 일원적 지배 시대로 돌입했다. 그해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 각지로 이산한 유대교도들의 고난은 500년 뒤에 홀로코스트로 귀결됐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유럽인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으로의 식민주의적 해외 진출을 거쳐 ‘근대세계 시스템’(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에겐 전쟁과 기아, 노예노동,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저개발과 빈곤이라는 재앙을 의미한다. 그 기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중한 보고서 중 하나가 라스카사스가 1552년에 간행한 <인디아스의 파괴에 대한 간결한 보고>다. 나는 코스타리카의 산들을 바라보면서 거듭 그것을 떠올렸다.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왕실이 주최한 바야돌리드 논전(1550~1551)에서 ‘엥코미엔다’(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정복자 또는 식민자가 토지 또는 마을을 수여받은 제도)를 사실상의 노예제라고 규탄하고, 정복의 중단을 호소했다. 한편 논적인 세풀베다는 “인간들 중에는 자연본성에 따라 주인이 될 사람과 노예가 될 사람이 있다. 저 야만인들은 죽음에 내몰리는 일이 있더라도, 정복당함으로써 매우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월러스틴은 2004년에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특별강의에서 이 라스카사스 대 세풀베다 논쟁을 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정세의 문맥 속에서 자세히 검토했다. 월러스틴은 ‘선진국’에 의한 간섭의 정당화는 예전엔 ‘종교’를 앞세웠지만 현대에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구미를 중심으로 한 범유럽 세계(여기에는 일본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의 지도자, 주류파 언론매체, 체제 쪽 지식인들의 레토릭에는 자기 정책의 정당화를 위해 보편주의에 호소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문명화’를 구실로 삼아 자기중심적인 국가주의를 앞세워 침략을 일삼아온 범유럽 세계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것을 그들은 ‘민족주의적 편견’으로 매도하고 탄압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적어도 16세기 이후 근대세계 시스템의 역사를 통해 권력의 기본적인 레토릭을 구성해왔다. ‘라스카사스-세풀베다 논쟁’은 500년 뒤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그는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된 보편주의를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르며, 거기에 대해 진정한 보편주의, ‘보편적 보편주의’로 대처하자고 호소한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보편주의’를 쌓아가려는 결의다. 그러지 않으면 라스카사스 이래 500년에 이르는 사상적 고투는 무로 돌아가고, 냉소주의가 최후의 개가를 올리게 될 것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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