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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분노의 봄 / 김병익

등록 2016-03-24 19:15수정 2016-03-24 19:36

이번 총선에서 왜곡된 경제 체제와 그 부정적 양상들, 친재벌 정책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빚는 부정적 양상을 극복할 지도자를 기대할 수 있을까. 청년 실업률이 최고에 이르렀는데도 이전투구의 정치와 왜곡의 경제에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헬조선’을 이 4월은 ‘잔인한 달’로 달구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죽은 사회다.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자가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분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가진 자의 부와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노예다.” 이 격렬한 목소리는 젊은 세대 운동권의 외침도 아니고 급진적인 야당 후보의 호소도 아니다. 경제학자 장하성의 저서 <한국자본주의 Ⅱ>의 한 대목이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제목답게 저자는 “불평등 상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열망과 노력은 부러움, 시기심, 질투에 근거해서 더 많은 부를 갖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분노를 갖도록 만든 조건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인 것이다.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부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예속의 상태, 복종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정당한 시도”라고 규정하면서 “한국 청년 세대에 희망은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미 20대는 ‘잉여’가 되었고 30대는 ‘포기’했다. 이미 포기했는데 희망이 없는 이유를 찾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조한다.

이 격렬한 분노를, 그것도 차가운 경제학 책에서 더구나 중진의 학자로부터 듣는 것은 처음이어서 오히려 신선하다. 아이 갖는 것도 미루고 결혼도 피하며 취업원서나 들고 다니며 스스로 ‘3포’를 넘어 ‘5포’, 드디어 ‘7포’까지 해야 할 요즘의 젊은 세대가 빠진 절망과 무기력을 은퇴한 내 나이로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열정적인 외침은 정서적인 공감을 몰고 왔다. 저자의 사촌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에도 공감했지만 감정을 버려야 할 경제학 책에서 ‘분노’를 외치고 있는 장하성 교수에게서 나는 우리 경제성장의 속살을 보았다. 그의 치밀한 분석은 1998년의 외환위기 때만도 심각하지 않았던 빈부격차가 그 후 ‘친기업 정책’이 수행되면서 지난 15년 동안 “소득 균형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해진 나라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소득계층 상위 10%가 전체 소득 중에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29.2%였지만 2012년에는 44.9%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9년부터 16년 동안 불과 2.2% 증가했던 그들의 소득은 1995년부터 2012년의 17년 사이 15.7%로 급증했다.

이렇게 소득 불평등을 촉진한 계기가 외환위기였고 이때부터 가계저축이 줄어들고 기업저축이 크게 늘어난다. 기업은 소득을 노동비용으로 공정분배하기보다 기업유보금으로 축적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 재하청기업 간의 불공정한 거래구조는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노동자는 소속 기업의 대, 중, 소 규모에 따라 심하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그나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로 잘못된 임금구조는 더욱 왜곡되었다. “한국 자본주의 형성 경로와 자본축적 과정이 남다를 뿐 아니라” 단기간의 급성장을 이룬 압축성장의 성급한 발전이 재벌 중심의 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은 “한국의 자본들이 아직 자본 외적 권력이나 질서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성은 따진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 커진다면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불평등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추상적인 철학논쟁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제기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물론 소득 불평등의 정도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미만한 문제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전세계 최고 부자 1천명의 부는 가난한 25억명의 부를 모두 합친 것의 2배이고 최상위 1% 부자들의 부는 하위 50%에 속한 사람들 부의 총합보다 거의 2천배나 된다. 미국의 대기업 변호사 아들들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이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마흔살이 되어 상위 10%의 등급에 들 가능성이 하급 공무원의 아들들보다 27배 높다고 했고 2007년의 신용붕괴 이후 국민총소득 증가분의 90%가 가장 부유한 1%에게 돌아갔다고도 했다. ‘기회의 나라’ 미국도 ‘금수저/흙수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선진자본주의국의 불평등 구조를 분석한 이 얇은 책의 부제는 분노 어린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정도가 더 심해, 억만장자 넷 중 셋이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이라고 보고되었다.(<한겨레> 3월15일치)

경제학의 바깥에서 경영학에는 눈길도 던져보지 못한 내 소박한 머리는 장하성과 바우만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분노의 자본주의론’에 소심하게 동의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신자유주의의 악덕을 숨긴 ‘세계화’란 멋진 얼굴과,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컴퓨터 등의 현대 과학기술이 일으킨 부정적 역할도 더불어 떠올린다. 세계화는 경제적 국경을 지우면서 부국과 빈국의 격차를 더 벌리고 실물경제로부터 금융경제로 전환시켜 세계 전체를 곧잘 신용위기로 괴롭힌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부와 편의와 풍요를 키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지구 자원의 소모와 기후 생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면서 효율성 제고란 이유로 노동비용을 최소화하여 자본의 팽창과 저소득 임금구조의 왜곡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20여 년 전 <노동의 종말>에서 블루칼라의 노동이 쇠퇴하고 후진국 노동력이 공략해 올 것이라고 예측한 대로 오늘도 ‘불법’ 취업 이민자들은 선진국으로 몰려들며 고통스런 삶을 겪고 있다. 알파고에서 인공지능을 확인하면서, 나는 인공지능학자 제리 캐플런의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인공지능과 인공노동으로 인간의 삶이 더욱 난감해질 것이란 예상을 보았다. 그는 “현대 사회의 2대 재앙인 지속적인 높은 실업률과 소득 불균형의 심화”를 지적하면서 “앞으로 신기술의 쓰나미가 자유, 편리, 행복의 놀라운 시대를 휩쓸고 올 텐데 그 과정을 순탄하게 지나가려면 반드시 진보의 핸들을 꽉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이번의 총선에서 우리는 사회 구조를 직시하고 왜곡된 경제 체제와 그 부정적 양상들, 낙수효과를 바라는 친재벌 정책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빚는 부정적 양상을 극복할 멋진 지도자를 기대할 수 있을까. <사피엔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한국이 멕시코, 타이 등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나라보다 행복도에서는 뒤처지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는 유럽 정치경제 상황을 진단하면서 ‘분노의 시대’(2016년 3월호)란 제목을 붙였고 서울대 <대학신문>(2월29일치)도 “사회에 뿔난 청년들, 한목소리로 정치권에 변화를 요구한다”고 보도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왜곡된 경제구조에 분노하며 새 시대를 이끌 젊은 진보적 사유와 정책을 갈망하고 있다. 장하성의 뜨거운 목소리는 이렇게 매듭짓는다: “청년 세대여, 자신을 탓하지 말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지 말고 거부해라. 청년 세대의 반역이 부재하는 시대는 어둠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고 희망을 다시 세울 자는 젊은이들이다.” 그래, 청년 실업률이 최고에 이르렀는데도 이전투구의 정치와 왜곡의 경제에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헬조선’을 이 4월은 ‘잔인한 달’로 달구어야 한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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