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본 한 뉴스 동영상의 장면이 쉽사리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단원고 졸업식 날, 새 떼 수십 마리가 학교로 날아와 졸업식이 진행되는 강당 주위를 원을 그리며 비행하다 옥상에 내려앉는다. 새들은 오랜 시간 옥상에 앉아 있다가 졸업식이 끝날 무렵 흩어진다. 이 동영상 뉴스를 전한 기자는 이렇게 묻는다. “친구들과 함께 졸업식장에 서고 싶었던 아이들이 온 걸까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야삼경(夜三庚)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김소월의 <접동새>). 비단 접동새뿐이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새로 환생했다는 설화는 뻐꾸기, 소쩍새, 파랑새, 까마귀 등으로 수없이 많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단원고 설화를 하나 더 추가한 셈이다.
새 떼를 숨진 아이들의 환생이라고 여기는 것은 쓸데없는 미신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 학교 옥상에는 평소에도 새 떼가 자주 날아와 앉았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영상을 본 많은 이들의 가슴에 한줄기 빗물이 흐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이들의 억울한 넋이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리라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다시 4월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남쪽 바다 맹골수도 앞 물빛도 봄의 햇살을 받아 날이 갈수록 푸름을 더해간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아이들의 넋을 달래줄 씻김굿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세월호특검법은 새누리당의 거부로 제대로 논의조차 못 한 채 19대 국회는 막을 내리고 있다. 특검 후보군 선정 범위까지 명시한 여야 합의문은 휴짓조각이 될 처지에 놓였다. 사고 직후 유족들에게 “특검도 해야 한다”고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은 한낱 속임수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눈을 들어 여의도 상공을 한번 바라보라. 국회의사당 주변을 맴도는 새 떼는 단원고 학생들의 넋이 깃든 새일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 앞뜰의 새소리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즐거운 지저귐으로 들리는가. 아니다. 그것은 영문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피맺힌 하소연일 수 있다. 차가운 바닷물이 밀려들어올 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던 아이들은 지금 새가 되어 부리를 서로의 깃털에 파묻은 채 파르르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얼마 전 테러방지법 등 쟁점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책상을 10여 차례 내리치고 “자다 깨 통탄할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자다가도 깨어나 통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 것은 채 피지도 못한 청춘들의 떼죽음이요, 화를 내며 책상을 쳐야 할 것은 소중한 어린 생명을 지키지 못한 대통령 자신과 이 정부 관리들의 무능함이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사람들이 기를 쓰고 특검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이제는 입에 올리기도 지겨운 ‘7시간 미스터리’ 때문일 것이다. 그 중차대한 시간에 대통령이 ‘무슨 딴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통령의 행적 감추기가 진실 규명의 최대 걸림돌로 등장한 현실은 처량하다. 만약 세월호특검법이 통과되는 상황이 오면 박 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책상을 뒤집어엎어 버릴 수도 있을 듯싶다.
원망의 화살은 야권으로도 향한다. 여당에 하염없이 끌려다니는 무능과 무기력 때문만은 아니다. 과연 야당은 지금 세월호라는 단어를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때는 ‘세월호 심판론’ 하나로 버티다 여당에 승리를 내주더니 이제는 세월호는 야당에서도 망각의 대상이다. 그리고 사분오열과 각자도생으로 무능과 거짓, 약속 파기로 점철된 이 정권에 완벽한 면죄부를 안겨주려 하고 있다. 그러니 야당 사람들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지금 야권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서 광야에서 가장 슬피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어린 새들일지 모른다.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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