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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애플은 독재와 싸우고 있다 / 박용현

등록 2016-03-08 19:35수정 2016-03-09 13:44

애플은 테러범이 사용한 아이폰의 잠금 해제를 도와줄 의무가 있는가? 애플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여러 건의 소송에서 맞붙고 있는 쟁점이다. 지난주 뉴욕 브루클린 연방지방법원은 애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애플에 그런 의무가 있는지를 판단한 게 아니었다. 이 사안의 법적 본질은 연방수사국이 애플을 압박하기 위해 227년이나 된 낡고 모호한 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법의 간략한 역사는 이렇다. 미국이란 나라가 막 틀을 갖춰가던 시절, 사법부도 새로 창설됐다. 하지만 새로운 사법체계의 작동에 필요한 각종 권한과 제도를 미리 예상해 일일이 법률에 나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1789년 ‘모든 명령 법’(All Writs Act)이란 걸 만들었다. 사법부는 역할 수행을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포괄적 규정을 뒀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났으니 사법체계도 잘 다듬어졌을 테고 이 법은 용도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느닷없이 이 법이 호출됐다. 연방수사국은 새로운 감청 장비인 ‘펜 레지스터’를 활용하고 싶었다. 전화회사는 (아마도 지금의 애플과 비슷한 이유로) 기술적 협조를 거부했다. 그러자 ‘모든 명령 법’을 꺼내 들었다. 펜 레지스터 설치에 협조하라는 법원 명령을 받아내 전화회사를 강제했다. 의회가 전화회사 등의 감청 협조를 법으로 규정한 것은 한참 뒤였다. 연방수사국과 법원이 의회의 법 제정에 앞서 국민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십년이 흐른 지금, ‘모든 명령 법’이 또 유령처럼 나타났다. 아이폰이라는 새로운 물건 때문이다. 잠금 해제를 해야 하는데 열쇠를 쥔 애플을 강제할 법적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의회 논의를 거쳐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게 민주적 절차일 것이다. 보안기능을 무력화하는 건 애플과 아이폰 이용자들의 권리를 제약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수사국은 이번에도 ‘모든 명령 법’부터 꺼내 들었다.

요약하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새로운 원칙이 필요한 상황에서 연방수사국은 매번 ‘원시시대’의 법을 들이대고 있는 꼴이다. “이는 미국 건국자들이 1789년 당시에 이미 (아이폰에 저장된 민감 정보를 어느 정도로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결론을 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브루클린 연방지방법원 제임스 오런스틴 판사)

여기에서 법과 권력의 속성을 생각하게 된다. 200년도 더 된 법을 끌어대서라도 권한을 확대하고 싶은 게 권력기관의 속성이다. 그들 손에 쥐어진 모호한 법은 애초 취지를 벗어나 황당무계하게 남용될 수 있다. 미국판 테러방지법인 ‘애국자 법’(Patriot Act)도 그랬다. 연방수사국은 법원의 허가조차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2003~2006년 19만2499차례나 이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로써 테러 혐의를 입증한 것은 단 1건뿐이었다. 나머지는 다 어디에 쓰인 걸까?

우리의 테러방지법이 위험한 것도 그래서다. 포괄적이고 모호한 규정이 곳곳에 널려 있다. 국가정보원은 ‘남용 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에 불법 개입하고 간첩 증거를 조작하고도 아무 반성이 없는 국정원 아닌가.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오런스틴 판사는 ‘모든 명령 법’을 남용해 정부의 권한을 확장하게 되면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방어막이 허물어진다고 지적했다. 법의 모호함 속에 독재가 숨어 있다. 하물며 그런 테러방지법을 여야 합의도 없이 통과시켰으니 민주주의의 방어막은 이미 뭉텅 허물어진 것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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