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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힐링 대신 필링 / 고영직

등록 2016-02-19 18:41수정 2016-02-19 20:31

2월 초 춘천에 있는 담작은도서관이라는 곳에서 한 독서모임의 초청으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책읽는춘천’이라는 독서모임에서 주관한 행사였다.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이 쓴 <시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한 달에 한 번씩 3년째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독서모임이라고 했다.

나는 이날 모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평일 저녁인데도 100명 남짓한 시민들이 손에 책을 들고 열공하는 모습이라니! 서경식의 <시의 힘>이라는 책은 평소 시를 자주 접하는 독자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 책 내용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해독하기가 녹록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은 시민들이 책에 대해 생각하고, 못다 푼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질문을 거리낌 없이 던지는 모습에서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고, 사회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서경식은 <시의 힘>에서 이 시대는 ‘교양의 자멸, 지성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아마도 이런 인식은 일본적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이겠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실상에 더 부합되는 인식이라고 간주해야 마땅하다. 정치는 없고, 통치(police)만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나를 바꾸는 ‘시의 힘’을 생각하며, 책 읽는 ‘시민’으로서 작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며 사는 삶을 살며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나선 것이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좀처럼 질문 세례를 멈추지 않는 시민들의 진지하고도 명랑한 열정을 보며 시민의 탄생을 예감할 수 있었다.

불안과 공포는 이 시대의 ‘근본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 비비안 포레스테가 제시한 ‘경제적 공포’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격차 내지는 빈부 격차가 ‘웃음의 양극화’로 이어지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힐링’에 목말라하며 아큐(阿Q)식 정신승리법을 내면화하는 것도 마냥 탓할 일만은 아닌 셈이다. 시장 유토피아의 자멸적 속성과 국가권력의 무책임한 본질에 대한 시민적 각성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불안과 공포의 감정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저마다 마음 수양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세로토닌 약물처방을 받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함의 감정을 공유하며 ‘뭐라도!’ 할 수 있는 필링(feeling)의 공통감각이 필요하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다시 말해 힐링 대신에 필링이 필요하다. 필링은 나를 나이게 하는 감정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정부 위정자들은 전쟁 불사, 핵무장 같은 무책임한 언사들로 인해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잠 못 이루는 부모들의 멍든 가슴을 생각하는 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위정자들의 나쁜 언어와 나쁜 정책이 우리의 심신을 몹시 심란하게 하는 시절이다. 우리 사는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빈약해진 현상이 우려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공장’ 이야기를 다룬 이인휘 소설집 <폐허를 보다>를 단숨에 읽으며 깊이 공명하게 된다. 소설에 나오는 ‘자본의 세계에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준 세상만 보고 죽는구나’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을수록 책 바깥의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시의 힘, 이야기의 힘은 바로 그런 필링의 감각이 아니겠는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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