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묵었다. 입춘에 붙이고는 떼지 않는 것이라더니, 고택마다 춘첩이 해를 넘기려 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세화연풍 화풍감우’ ‘요지일월 순지건곤’ ‘상재지향 금구무결’ ‘시화연풍 국태민안’ ‘서기운집 입춘대길’ ‘천재설소 만복운흥’.
자존심 세다는 영남반촌이라 그러한가.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처럼 ‘백세인생 부자 되세요’ 식의 노골적 축문은 많지 않고 봄기운 겨울까지 데려갈 듯한 훈기가 여기저기 넘쳐났다. 집집마다 사진으로 남겼다.
입춘이 지났다 했더니 이틀 뒤면 우수다. 요즘 춘첩을 써 붙이는 집이 많지 않은데, 서울이라도 한옥 많은 동네에 살다 보니 ‘입춘대길 건양다경’ 대구로 춘련을 써 붙인 집이 종종 보인다.
4월 총선이라 말 그대로 입춘대길 꿈꾸는 이들이 경향 각지에 차고 넘친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이들만 벌써 1500명에 이른다. 마당을 쓸었더니 ‘금배지’가 쏟아지는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을 춘첩으로 써 붙이고 싶은 마음 굴뚝같을 것이나, 선량을 꿈꾸는 점잖은 이들은 아직 ‘시화연풍 국태민안’(時和年豊 國泰民安)의 마음일 테다.
말은 때로 험하나 붓끝에서는 꽃이 피는 정치인들은 많다. 그런데 여의도 의원회관 자기 방문에 ‘국태민안’까지는 아니어도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집마다 부족함 없이 넉넉한 민생을 챙기겠다는 춘첩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당사도 마찬가지. 국회 앞 새누리당 당사에 내걸린 ‘새누리당 국민공천’ 현수막이 우리 시대의 춘첩인지도 모르겠다.
춘첩에 붓글씨라면 이분을 빼놓을 수 없겠다.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붓글씨에 일가견이 있으니 진실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다. 선거 주무 현직 장관으로 새누리당 연찬회에 참석해 ‘총선필승’ 건배사를 거침없이 외쳤던 그는, 입춘 하루 전인 지난 3일 대구 동갑에 선거사무소를 열었다. 경북 경주가 고향인 그가 대구시의 ‘시목’인 전나무 가지 꺾어 커다란 붓을 달고는 솜씨 좋게 써내려간 글씨는 ‘수의불이심’ 다섯 글자였다. ‘의리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라는데, 행사 끝날 즈음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하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어째 그의 ‘수의불이심’이나 ‘대한민국 만세’에서는 같은 티케이(TK)인 안동에서 보았던 ‘국태민안’이나 ‘시화연풍’의 큰 뜻과 넉넉함은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 헌법학자인 그가 지난해 국회법 개정이 논란이 됐을 때 자신의 학자적 소신과 견해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버린 것을 생각하면 ‘수의불이심’이라는 말은 더욱 마뜩잖다.
청와대도 춘첩자를 붙일까 궁금한 차에, 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특별연설을 위해 국회에 들렀다. 이르는 곳마다 아우성이라 요순시절 태평성대를 바라는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을 차마 스스로 내걸지는 못할 것인데, 북쪽 사정이 심상치 않다 보니 역시 축문보다는 사악한 잡귀를 쫓겠다는 벽사문만 잔뜩 붙이고는 국회를 떠났다. ‘개성공단 내가중단’ ‘총화단결 사드배치’ ‘관심법안 먼저통과’.
대문에 붙인 춘첩을 보고 지난 한 해 그 집 손자 글솜씨가 얼마나 늘었나 가늠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 4년 새누리당 솜씨는 얼마나 늘었을지 궁금하다. 대문에 어떤 후보를 내걸 것인지, 그의 말에서는 향기가 있을 것인지, 공약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질 것인지.
우수에는 대동강물도 풀린다는데 이번주는 다시 춥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이참에 따뜻한 마음 담은 춘첩 하나씩 써보자. 의리, 진실, 배신 말고, 다들 입춘대길 건양다경.
namfic@hani.co.kr
김남일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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