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새해 기획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시리즈는 한국 사회 청년세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18일 ‘딱 170만원만 벌었으면…청년 절반 근로빈곤 위기’ 기사에는 포털에서 80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생활 8년 동안 한번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130만원 이상 월급을 받아보지 못한 정애씨 이야기였다. 공감과 분노를 표현한 댓글도 많았지만, 상당히 많은 댓글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런 반응을 단순히 ‘꼰대’나 ‘일베’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꽤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 정의 관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도덕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공정성(공평성)’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가 기여한 만큼 그에 따르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보며,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불평등한 결과가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똑같이 이득이 분배되는 것을 대부분의 성인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의외로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이트는 이를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기꾼, 게으름뱅이, 무임승차자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발전시킨 심리학적 기제라고 해석한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음에도, 한발만 더 각론으로 들어가면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결과의 불평등’을 인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 있다. 적어도 ‘기회의 평등’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회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법적 권리가 똑같이 주어졌다는 식의 기회균등으로는 부족하다. 노예제나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모든 기회가 형식적으로는 열려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비슷한 능력과 재능을 가졌더라도 같은 인생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인생의 기회는 계층(부모), 사회구조, 운과 우연 등에 좌우된다.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려면 이런 사회적 환경의 영향력이 제거돼야 한다. 선진국은 교육과 복지 제도를 통해 이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청년들에게 “더 노력하라”고 요구하려면 적어도 그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질적 기회 평등은커녕, 형식적인 기회 평등마저 흔들리고 있다. 정치인, 고위관료 등 권력층의 자식 취업 청탁 행태가 계속 드러나면서 ‘음서제 사회’ ‘신신분제 사회’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 이동을 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무임승차자도 게으름뱅이도 아닌, 그저 조금 평범했을 수 있는 많은 청년들이 120만~13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언제 잘릴지 모를 일자리를 떠돌 것을 강요받고 있다. “개척할 미래도 없고, 계발할 여유도 없는 만기없는 형벌”(웹툰 <송곳>)이다.
<송곳>에서 애써 자신의 현실을 부인하려 하는 20대 파견노동자가 따지듯이 묻는다. “운동회 때도 달리기 1, 2, 3등한테 상 주지, 꼴찌한테 주는 거 아니잖아요.”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쩌라구요. 본인이 책임져야죠.” 구고신 노무사가 대답한다. “1등한테 상 주는 걸 누가 뭐라 그래요? 1등 못하면 벌을 주니까 문제지.” “패배는 죄가 아니오.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출발선도 다르게 그어놓고, 1등 못했다고 벌까지 주는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한국 사회 불평등은 합리화될 수 있는 선을 넘고 있다.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shan@hani.co.kr
안선희 사회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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