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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혐오의 이면 / 문강형준

등록 2016-01-15 18:59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혐오’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기계처럼 끊임없이 혐오를 필요로 했다. 70년대 이후에는 ‘전라도’와 ‘빨갱이’(‘북한’의 변주)가 박정희 및 전두환 독재정권의 존속을 위해 혐오되어야 했고, 90년대 이후 현재는 여성과 동성애자, 장애인, 비정규직, 동남아 노동자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북한을, 독재체제는 전라도와 빨갱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취약하거나 소수인 주체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요청한다. 가상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가리는 방식. 핵심은 혐오의 대상이 사실은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기보다, 혐오를 요청하는 구조적 메커니즘, 즉 시스템을 살피는 데 있다.

하지만 오직 앞으로 달려가는 것만 아는 이 눈먼 자본주의는 시스템의 일을 사적인 문제로 뒤바꾼다. 자, 무한경쟁 속에서의 생존이 삶이라는 무대의 유일한 장치가 되었고, 이 무대 위에서의 승패는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조금만 한눈팔면 ‘루저’가 될 수 있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개인들이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차별적 생존경쟁 과정을 정당화해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긍정’에 대한 믿음, ‘승자’에 대한 찬양, ‘힐링’의 필요 등이 이런 이데올로기들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그러나, 지독히도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이들, 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배한 이들, 그러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 힐링 대신 기존의 구조를 문제 삼으며 변혁을 외치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긍정과 열망과 희망이 과도하게 예찬되는 사회는 반드시 예찬의 반대편에 놓인 이들에 대한 끈질긴 혐오도 함께 끌어들인다. 긍정의 물신화는 강력한 혐오의 대상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의무 대신 권리만 주장하고,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여성’, 실패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애인’과 ‘동남아 노동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성정체성의 범주를 뒤흔드는 ‘동성애자’, 내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질서를 변혁하려 하는 ‘좌파’와 ‘파업노동자’들, 보수정권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전라도 사람들’, 이들은 다양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내게 ‘편한’ 기존 질서를 위협하거나 그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이라는 이유. 신자유주의적인 질서 속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나’에게 이들은 불편함을, 위협감을, 불안감을, 피곤함을 느끼게 만든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생존경쟁에만 힘쓰며 살고 싶은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혐오’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것, 이를 뿌리 뽑기가 불가능한 것, 혐오의 대상의 죄 없음을 증명하거나 혐오의 주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지배질서인 신자유주의는 긍정과 혐오를 함께 필요로 하고,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게 유일한 목표인 ‘우리’들을 긍정과 혐오의 이중구속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에 대한 혐오에서부터 무슬림에 대한 혐오에 이르는 혐오의 물결이 희망과 욕망과 소통과 힐링을 긍정하는 한국과 전세계에 ‘글로벌’하게 퍼져 있고, 이 긍정과 혐오의 세계화로부터 다시 세계의 끝에 대한 상상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당분간, 긍정과 혐오와 파국이라는 감각의 트라이앵글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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