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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신종 쿠데타’론에 대하여 / 염무웅

등록 2016-01-14 19:30

국민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소수지배 체제의 정착을 저지하는 것, 즉 다수지배로서의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총선에 대한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다. “세계가 유지된다면 정치도 새로이 시작될 수 있다”는 최소 공리를 결연히 믿고 매순간 엄습하는 절망감과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난해 12월 발행된 <창작과비평> 겨울호 머리말에서 이남주 교수가 현 정치 국면을 이해하는 열쇠 개념으로 ‘신종 쿠데타’론을 제기한 이래 이 논의는 ‘창비주간논평’ 난을 통해 조금씩 진전되고 있다. 예컨대 이 교수 본인의 ‘안철수 탈당 이후 민주개혁세력이 갈 길’(2015년 12월16일)에 이은 김종엽 교수의 ‘국회의장의 어깨에 걸린 민주주의’(12월23일)와 백낙청 교수의 신년 칼럼 ‘신종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면’(12월30일)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논의들은 창비그룹 내부의 어젠다로만 머물러 있을 뿐, 더 확장된 토론으로 번지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나 정치권이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총선·대선을 한꺼번에 앞두고 있던 4년 전의 상황과 매우 대조적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백 교수 자신이 <한겨레> 특별기고 ‘엠비 이후의 큰 그림을 그리자’(2011년 5월16일)를 시발로 ‘2013년 체제를 준비하자’(<실천문학> 2011년 여름호), ‘김정일 이후와 2013년 체제’(창비주간논평 2011년 12월29일) 등 논설을 잇달아 내놓은 끝에 <2013년 체제 만들기>(창비, 2012)라는 저서로 그간의 구상을 종합함으로써 논제의 대중화에 적극 나선 바 있었다. 이와 맞물려 지식인사회 일각에서도 2012년의 정치행사에 대비한 연합정치 내지 선거연합 논의가 활발했고, 정치권도(물론 주로 야권이지만) 이에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어쩌면 그때의 선거 실패가 오늘 ‘신종 쿠데타’론에 대한 냉담을 낳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면 현실에 대한 이론적 분석 없이는 대책도 대안도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토론의 빈곤은 시민의식 쇠퇴의 반증이자 그 자체 정치위기의 징후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 아래 먼저 개념부터 살펴보자. 이남주 교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비롯한 박근혜 정부하의 일련의 사태들이 “1987년 이후 구축된 민주적 거버넌스를 무너뜨리고 수구 헤게모니를 영속화할 수 있는 정치적 기초를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바, 곧 ‘신종 쿠데타’(creeping coup d’etat) 전략”이라고 규정한다. 다른 말로 그는 민주적 체제의 점진적 폐기로 완성될 “일종의 저강도 쿠데타”, “수구세력의 영구집권체제를 복원하려는 21세기 한국의 맞춤형 변종 쿠데타”라고 정의한다.

백낙청 교수도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 좀 더 세분화된 개념 규정과 구체적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가령, 그는 ‘신종 쿠데타’론이 흔히 들먹여지는 ‘파시즘 부활’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퇴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것이 곧 1987년 이전 군사독재체제의 부활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휴전 이후 세 번 겪은 쿠데타 가운데 이번 것은 “87년 이래의 민주화된 제도와 관행들을 전방위적으로 허물어가는 과정의 중심에 대통령 자신이 있다는 점에서 5·16이나 5·17보다는 10월 유신을 닮았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남주·백낙청 두 분의 현실인식의 내용에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신종 쿠데타’라는 개념의 사용에는 얼마간 주저가 따른다. 백 교수는 “전두환 일파는 12·12로 먼저 군부를 장악한 뒤 이듬해 5·17 계엄 확대로 일종의 ‘할부식’ 쿠데타를 완수했다”고 묘사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비교될 만한 예를 가져오자면 1952년 7월 나세르가 이끌던 자유장교단의 군사행동부터 1954년 4월 나세르의 최종적 집권에 이르는 이집트 정변도 ‘할부식’ 또는 단계적 쿠데타였다. 물론 전두환 일파의 그것과 양상은 비슷한 데가 있어도 목표는 아주 달랐다고 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 이집트는 지금까지 60년 넘게 군사독재를 지속하고 있다. 어쨌든 이집트의 경우 초기 2, 3년은 그 나름의 ‘신종 쿠데타’라고 부를 수 있어도 60년 전부를 그렇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5·16부터 시작된 박정희의 18년은 이집트의 경우와 달리 그 전체를 한 덩어리의 연속된 쿠데타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정착된 개념으로서의 군사독재 또는 개발독재 개념을 굳이 바꿀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백 교수는 오늘의 정치 국면이 흔히 말하는 ‘유신 회귀’, 즉 “1987년 이전 군사독재체제의 부활은 아니”며 ‘파시즘 부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전두환의 변형된 유신체제를 묶어 군사독재라 할 때, 비록 현 정권의 핵심 인사가 아무리 그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와 회귀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오늘의 상황을 그 시절로 돌리는 것은 자연법칙이 허용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민주화의 산물로 구축된 제도들이 적잖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아직 작동하고 있으려니와, 무엇보다 지구화·정보화 등 객관적 조건 자체가 40년 전의 체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파시즘 논의는 어떤가. 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팩스턴의 두툼한 저서 <파시즘>(손명희·최희영 옮김, 2005)을 아주 흥미롭게 읽은 바 있는데, 거기서 얻은 지식에 따르면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파시즘 이외에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수많은 변종 내지 유사 파시즘이 출몰했다. 그의 연구에서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일본의 경우로서,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천황제 파시즘’이란 개념이 반성 없이 유통되어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팩스턴은 “1932~1945년의 일본제국은 파시즘 체제라기보다 국가가 지원하는 상당 수준의 대중동원을 가미한 팽창주의적 군부독재”라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아마 한국의 소위 유신체제는 일제 식민잔재 위에 세워진 이중으로 변형된 파시즘으로서의 군사독재일 것이며, 오늘의 국면은 유신 잔재의 부분적 재활용을 통해 지배블록의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라 할 터인데, 예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지배블록 안에서도 대기업 중심의 시장권력이 사실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신종 쿠데타’론은 지배블록의 장기집권 프로그램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이라는 데 강조점을 둔 담론이다. 물론 현 국면을 ‘신종 쿠데타’로 보든 ‘변형 파시즘’으로 보든 절대다수 국민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소수지배 체제의 정착을 저지하는 것, 즉 다수지배로서의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다가오는 총선이 하나의 분기점이 되리라는 데는 많은 논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데, 알다시피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다. 박근혜 새누리당은 지난 3년간 세월호 참사, 위안부 문제 합의, 노동탄압 등 거듭된 압제와 실정으로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임에도 지금 느긋하게 대세를 관망 중이다. 반면에 야당은 기세 좋게 공세에 나서야 할 시점인데도 제 앞가림도 못한 채 지리멸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나마 안철수의 탈당으로 조성된 야당 분열은 한국 정치판도에 어떤 변동을 만들어낼지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국민 자신들의 정치적 활성화가 기성 정치권에 압박으로 작용하는 것도 크게 기대할 형편이 못 된다. 대학과 종교계 등 과거의 전통적 압력단체들도 힘을 잃은 지 오래고, 언론 역시 주류는 그 자신이 지배블록의 일원으로 추락하여 온갖 역기능에 복무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할 것인가. “세계가 유지된다면 정치도 새로이 시작될 수 있다”(권정우·하승우 지음, <아렌트의 정치>, 한티재, 2015)는 최소 공리를 결연히 믿고 매순간 엄습하는 절망감과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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