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에 전략은 있는가.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당국자들을 믿고 발 뻗고 잘 수 있는가. 지난해 말과 올 초를 달구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협상과 북한의 제4차 핵실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한 나라의 외교·안보 전략은 그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특히, 세계 및 지역 질서가 요동치는 시기의 전략은 생사를 가른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다. 세계적으로 미국의 초국적 지배 체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해가 갈수록 거세지고, 이슬람국가(IS)의 발호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중동 패권 다툼이 지각을 흔들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는 미-중 대립·경쟁 구도에 중-일 패권 경쟁과 김정은 북한 정권의 불가측한 도발이 더해지면서 정세의 유동성이 커지고 있다.
항해에 비유하자면, 바람이 거칠고 파도가 높은 험한 바다를 그리 크지 않은 배를 타고 무사히 건너야 하는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선장과 기관사들이 안전 항해에 필수적인 해도와 나침판은 제대로 구비나 하고 있는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먼저 위안부 문제를 보자. 대통령 스스로 제시한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을 만족하기는커녕 ‘불가역적’이라는 모멸적 용어가 담긴 협상 내용과,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따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이니 ‘대승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수용해 달라는 정부의 위압적인 후속 대응에 당장은 비판이 몰리고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대일 관계를 한 꾸러미로 꽁꽁 묶어 제기한 애초의 전략적인 실수에 있다. 이런 탓에 밖에선 중국 견제에 중점을 둔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과 어긋나게 되고, 안에선 경제와 안보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국제보편적 가치 문제가 양자 간 정치 문제로 축소됐다. 굴욕적인 ‘12·28 위안부 합의’는 이런 자승자박 외교가 자초한 참사다. 위안부 문제에 다걸기(올인)를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압박도 피하고 더욱 강하게 일본을 몰아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집권 초 ‘대일 탈레반 외교’를 설계하고 집행한 사람의 무능과 책임이 크다.
북핵 문제도 우왕좌왕, 임기응변의 비전략적인 언행만이 춤을 춘다. 북한이 2006년 이후 대략 3년 단위로 협상이 중단된 기간 중 핵·미사일 도발을 자행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정부의 부작위도 4차 핵실험을 몰고 온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미국이 ‘전략적 인내’ 정책을 취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북핵의 가장 큰 위협권에 있는 한국 정부가 내용도 없는 ‘코리안 포뮬러’(한국 방식)와 ‘탐색적 대화’만 되뇐 채 북한이 협상에 복귀할 아무런 유인과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윗분의 지시인지 모르지만 정부가 핵실험에 확성기 재개로 맞불을 놓은 것은 무전략의 극치이다. 국내 보수층을 염두에 둔 정략적 대응으로 짐작되지만, 선후와 경중을 잃은 조처로 국제 공조에 역효과만 낳고 있다. 영국 외무장관이 확성기 재개에 자제를 촉구했고, 중국도 확성기 재개 이후 대북 비판에서 ‘각국의 냉정과 절제’로 강조점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해만 해도 박 대통령은 몇 가지 아주 ‘이상한 외교’를 했다. 중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나라가 텅텅 비도록 청년들을 중동으로 보내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경제외교를 한다고 한가하게 남미를 순방했다. 미국, 일본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중국의 전승절 참가는 제4차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어떤 효험을 발휘할 것인지 지금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묻고 싶다. 지금 박 정부는 나라를 살리는 외교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눈앞의 이해에만 급급한 정치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가. 그 답변을 행동과 결과로 듣고 싶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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