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사상이다. 이 말은 제도화하지 않는 거룩한 사상과 신념만 가지고는 정치적·사회적 의사표현을 온전히 수행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이 행사하고 있는 참정주권은 2표 중 1표의 효력이 투표와 함께 소멸한다는 점에서 0.5체제다. 1인1표제는 다 실현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주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승자독식 소선거구 선거제에서 선거는 불행히도 패배의 제도다. 제도 자체가 패배를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 대의제 체제에서 불가피하게 위임하게 된 주권은 사라지거나 패배해서는 안 된다. 주권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신성불가침 위에서 민주정체는 비로소 온전한 성립 자격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13대 총선(1988)에서 19대 총선(2012)까지 7162만표가 죽은 표가 되어 주권을 반영해보지 못한 채 극히 민주적으로 소각되었다. 저울로 쟀을 때 총선거 때마다 증발하는 주권의 무게는 평균 90톤에 이른다. 선거를 통해 주권이 강화된다기보다 투표행위와 동시에 거의 5할이 사표로 휘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찍은 후보가 자주 떨어지는 비밀이 이것이다.
주권을 계량화해보는 까닭은 주권의 감각적 크기와 또 얼마나 값싸게 주권이 소멸하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주권위임제도인 선거에서 주권은 투표장에 들어가서 잠시 살아나는 듯하다가 투표함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채 2분이 걸리지 않는 이 시간에 유권자 숫자를 곱하면 한국인의 주권 시간이 나온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또한 누군가 동의해둔 위임제에 다시 위임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선거와 투표로 위임되는 권리는 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상 그 위임을 철회하거나 회수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회수 불가능은 그 민주성을 내부에서 부인하는 민주제도의 자기모순이다. 근대 민주정체의 뼈대인 대의제가 가지고 있는 원시적 맹점이다. 회수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절차 자체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구체인 선거가 위임을 정당화하는 형식일 뿐일 때 이는 주권을 합법적으로 낚아채거나 훔쳐간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도가 민주사상을 담보해내려면 이제 선거와 투표 형식을 바꿔야 한다. 우선 다른 여지가 없는 양당지역체제의 선택 강요에서 해방되는 길은 민의의 크기에 비례해서 정당과 의석이 존립하게 하는 것뿐이다. 집안, 학력, 부의 대물림, 정치세습 등 금수저 인물의존에서 벗어나 정책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비결 또한 마찬가지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양극화 따위 사회모순을 당사자가 의논하고 해결할 수 있으려면 직능·계층·부문·세대가 두루 참여할 수 있는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권자의 이러한 다층적 의사결정 참여를 동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제도는 전면적 비례대표제 말고는 아직 지상에 없다. 이는 패배 없는 선거, 1인1표제 민주주의 1.0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다. 내가 찍은 후보나 정당이 언제나 당선할 수 있는 길은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비례대표제포럼(2010)이나 현재를 정치적 비상상황으로 간주하고 창립한 119포럼의 요구 또한 제도개혁이다.
민주대업인 총선거가 있는 새해가 오고 있다. 패배 없는 선거와 입맞출 것인가, 다시 죽은 표와 함께 주권을 구겨버릴 것인가. 정치세력 이합집산에 몰입하는 시간을 조금만 할애해서 제도개혁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세밑은 또 어떤가. 덧붙이건대, 청춘대업인 첫 키스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면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투표 연령, 딱 여기까지만 내리자.
서해성 소설가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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