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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태규 칼럼] 두 개의 연설과 한 권의 책

등록 2015-12-23 18:45

2015년 한해의 뒤끝이 꿀꿀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지위를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군주국의 여왕’쯤으로 오인하고 있는 그분은 연일 역정과 다그침만 남발하고 있다. 주위엔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는 대찬 선비 한 명 보이지 않고, 그저 레이저 광선을 피하기에 급급한 허접스러운 딸랑이들만 수북하다. ‘혼용무도’라는 말이 충분히 나올 법한 상황이다. 이런 행태를 비판·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은 분열과 갈등으로 제 앞가림을 하기도 벅차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한다’는 바로 그 세상의 전형이다.

연중에도 성완종 리스트, 메르스 전염, 북한의 지뢰 도발로 인한 군사긴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같은 대형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을 불안과 고통, 좌절과 절망 속에 빠뜨렸다. 그래도 곰곰이 되돌아보니, 희망의 단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월 국회의 새누리당 유승민 당시 원내대표의 대표연설과 6월 정의당 조성주 후보의 당 대표 출마선언문, 9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들이 펴낸 <축적의 시간>이 그것들이다. 두 연설이 각기 건전한 보수와 새로운 진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나침판이라면, <축적의 시간>은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가 그 늪에서 빠져나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유승민 의원은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합시다’라는 매우 긴 분량의 연설문에서 공동체를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한 양극화를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목하면서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나누면서 커가는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대안으로 내놨다.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는 반성과 함께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세금과 복지의 함수에 대해서는 ‘중부담-중복지’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제시하면서, 그분이 되뇌고 있는 ‘증세 없는 복지’가 허구임이 증명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마 이 대목이 그분의 역린을 건드려,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설문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개혁적 보수주의자로서의 진정성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두려움 없이 ‘광장’ 밖으로 과감히 나아갑시다”라는 30대 조성주 후보의 출마 선언문은 ‘2세대 진보정치’라는 신개념을 들고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차고 신선하다. 그는 “보수 양당체제의 협소한 민주주의를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민주주의로 확장한 것은 1세대 진보정치의 정치적 성과”라고 평가한 뒤 “그러나 우리가 이루어낸 성과에 안주하고 서로 다투는 사이에 민주주의의 광장은 좁아졌고, 우리가 보호해야 할 시민들은 광장 밖으로 쫓겨나고 있다. 2세대 진보정치는 그 광장 밖의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및 자영업자의 고단한 삶에서 목도할 수 있듯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노동운동 밖의 노동’에 대한 경험과 대안이 차세대 진보정치의 가장 절박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책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문제의식이란 걸 느낄 수 있다.

우리 산업 현장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 26명의 경험과 지혜를 담은 <축적의 시간>은 앞의 두 연설문과는 결이 다르지만,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를 구하고자 하는 충정에선 상통한다. 교수들은 이 책에서 이제까지의 남 따라하기와 속성재배에서 벗어나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고 숙성하는 사회적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하지 않으면 앞날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산업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분석과 제언이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앞길이 막막해 보이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지도 찾지도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올해 나온 유승민, 조성주의 연설과 서울대 공대 교수들의 책이 더욱 소중해 보인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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