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행정이 있었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니다. 문화예술 동네에 엄습한 사전검열 논란을 보노라면 이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 동네에 있는 나와 그대들만 몰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행정기관 종사자들은 지구가 멸망해도 왜 지구가 멸망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멸망한 지구를 처리하기 위해 또다시 행정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행정의 언어는 유연하다. 지난 10일 조계사에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저는 해고 노동자입니다”라고 선언했지만,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말은 행정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적어도 행정의 언어는 다운사이징, 규모 적정화, 스마트사이징, 구조조정, 직제 간소화처럼 소위 노동시장 유연화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고서는 그 자격을 얻어내기가 힘들다. 살아 있는 존재를 기계공학적인 언어로 변환하지 않는 한, 절대로 행정의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돌려막는’ 것이 어디 신용카드뿐이랴. 행정은 언어를 돌려막는 것을 좋아한다.
사회주의 또한 그러했다. 트래비스 홀랜드가 쓴 <사라진 원고>는 1939년 스탈린 치하 당시 문화검열을 통해 감시와 처벌의 문제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스탈린 치하 루뱐카교도소에서 희생된 유대계 작가 이사크 바벨(1894~1941)의 마지막 순간을 추적하며 쓴 헌정소설이다. 교도소 실무책임자인 라들로프 소령과 전직 문학교사 출신의 문서국 직원 파벨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 퍽 인상적이다. 집산화와 식량 부족 사태에 관해 라들로프 소령이 말한다. “기아라니, 무슨 말이지? 우리 민족은 기근을 겪지 않았잖아. 적어도 소비에트 치하에서는. 물론 생산 차질은 있었지. 하지만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데 기아라니? 사태를 과장한 게로군.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헬조선’에서는 시간도 몹시 더디 가는가. 그래도 시계의 초침은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한 해를 회상하며 드는 생각은 대체 기쁨의 감정을 언제 만끽하며 살았는지 아리송하다는 점이다. 유독 문화예술 분야에서 행정의 파행이 그치지 않은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정부가 제시한 국정지표인 문화융성 대신에, 왜 현장 예술가들이 검열융성이라고 비아냥하는가. 2015년 한 해는 역사의 저편으로 진즉 사라진 것으로 간주된 문화검열 논란이 장르를 넘나들며 줄기차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해로 기억될 것이다.
행정의 언어는 질서를 신봉한다. 최근 댓글 논란의 진앙지가 된 서울 강남구청의 부서 명칭이 ‘시민의식선진화팀’이라는 사실에서 민(民)을 바라보는 관(官)의 위계화된 무의식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는 ‘국민의식선진화팀’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자책했을까. 언어에 투영된 행정의 무의식을 보면 다양성보다는 모노톤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크리스마스트리, 삼나무 심기처럼 단일 수종을 심을 경우 당장의 성과는 낼 수 있으나, 2세대 나무에 이르러선 20~30% 생산 손실이라는 퇴행이 일어나면서 숲의 죽음이 시작된다고 전한다. 그는 숲의 다양성이 파괴되는 현상을 ‘행정가의 숲’이라고 개념화하는데, 이에 대한 대안은 ‘자연주의자의 숲’이라고 명명한다. 나와 그대들이 사는 숲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숲의 다양성이 보존되는 자연주의자의 숲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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