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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태규 칼럼] 정주영 100돌과 1001마리 소떼

등록 2015-12-02 18:40

사람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는 걸 요즘처럼 실감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겹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11월22일)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돌(11월25일) 행사가 여실히 보여준 바다.

사람이 신이나 악마가 아닌 이상 100% 선인이거나 악인일 수는 없다. 누구나 비율의 문제일 뿐이지, 선악의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김 전 대통령과 정 명예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단행, 군정 종식 등 굵직한 공이 있지만, 배신적인 3당 합당과 영남 지역패권주의 강화, 남북관계 악화, 금융위기 초래 등의 과도 크다. 정 명예회장도 뚝심과 창의력으로 맨땅에서 경제 기적을 일궈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짙은 그림자도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번 일을 통해 실상에 비해 좋은 면이 훨씬 많이 조명받았다. 죽은 자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정서를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두 사람이 모두 후한 평가를 받게 된 데는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 탓이 크다. 민주를 탄압하고 독재를 지향하는 듯한 박 대통령의 행태가 김 전 대통령을 민주 투사로 살려냈고, 추락 일로의 암울한 경제 상황이 정 명예회장을 도전과 창조적인 경제인의 본보기로 불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 명예회장의 공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한 기여는 실제에 비해 소홀하게 평가받고 있는 감이 있다. 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중견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이 9월에 ‘정주영과 남북관계’라는 주제로 특별 세미나를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부족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숨진 뒤 정 명예회장의 아들 가운데서조차 아버지의 남북관계 유업을 진지하게 계승하려는 사람을 찾기 힘든 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개중에는 되레 아버지의 뜻과 정반대되는 언행을 하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1998년 1001마리의 소떼 방북으로 상징되는 정 명예회장의 담대한 대북사업은,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했듯이 그 자체가 장관이면서도 역사였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발을 맞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라는 남북 경협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전기가 되었다.

정 명예회장은 단지 경제적 실리라는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남북 경제통합과 동북아 경제권까지 꾀하는 것을 시야에 두고 대북사업을 구상하고 실천했다. 쉽게 말해, 경제를 통한 점진 통일의 길을 실행한 셈이다. 전쟁을 통한 통일이 가능성 없는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다.

역사적인 예를 봐도, 정치적 갈등은 정치나 이념을 앞세우기보다 경제적 이해로 접근해야 더 쉽게 풀린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사카모토 료마인데, 그 이유는 그가 막부 타도의 양대 세력이면서 서로 원수지간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손 잡게 함으로써 유신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때 사카모토가 두 번을 화해로 이끈 무기가 바로 ‘해원대’라는 공동출자 해운회사의 설립이었다.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를 물리치고 고려를 창건하는 데 크게 기여한 나주의 세력권 확보는 송악 호족인 왕건 집안과 나주의 호족 세력이 중국 무역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다져진 연대감이 배경이 됐다고 한다. 최근 66년 만의 수뇌회담으로 세계의 눈길을 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의 만남도 경제우선 정책의 자연스런 결과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남북관계가 이념적 원리주의에 매여 교착상태에 있는 지금, 정 명예회장의 ‘1001마리 소떼 정신’은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마침 11일 개성공단에서 ‘8·25 합의’ 후속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린다. 남북 모두 그의 다음 말을 등대 삼아 항로를 열어나갔으면 한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면 된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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