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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 누구인가 / 염무웅

등록 2015-11-26 18:42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 정권에 의해 만들어질 국정 역사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본연의 자유민주주의로 돌아와야 한다.
“대한민국 부정하는 역사교과서 바로잡겠습니다.” 새누리당 당원협의회 이름으로 된 이런 플래카드가 가로수에 묶여 펄럭이고 있다. 그런 역사교과서가 정말로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데, 사람들은 태평한 얼굴로 그 밑을 지나다니고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교과서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심사를 맡았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현행 역사교과서에는 좌편향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치권의 허위선전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터무니없는 허위를 실재하는 사실인 것처럼 날조하는 기만적 강변을 통해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이는 것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만 그치지 않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거듭 손상을 입어왔지만, 작금년에는 단순히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갖가지 언어도단의 중심에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그는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도 “현 역사교과서는 우리 현대사를 정의롭지 못한 역사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나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술적 결론을 내려, 많은 사람들 입길에 올랐다. 이 말이 평범한 시민의 입에서 나왔다면 웃어넘겨 그만이었을 터이고, 역사학자의 주장으로 제기되었다면 논쟁의 과정을 통해 그 주장의 부당성과 위험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나름 국민계몽적 효과조차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미명 아래 강행되는 사태 안에는 내가 보기에 몇 개의 밀접하지만 서로 구별되는 안건이 교차하고 있다. 하나는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다원성을 해체하려는 파시즘적 발상이 준동한다는 점이다. 보수언론도 국정화를 비판한 데서 드러나듯이,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단일 교과서의 국가적 강제는 일부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후진적 제도일뿐더러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방식이다. 그나마 1974년 유신시대의 국정 국사교과서는 그런대로 정평 있는 학자들이 이름을 걸고 집필했고 전문가들의 공개적인 논평을 받기도 했다. <창작과비평>그해 여름호는 ‘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하여 ‘사관(史觀)과 서술체재’, ‘상고사’, ‘고려시대’, ‘조선 전기’, ‘조선 후기’ 등 분야별로 상당히 심층적인 검토를 한 바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필자들 중 한 명이 현재 국정화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배씨라는 점으로, 나는 원고 받으러 찾아갔던 당시 고려대 그의 연구실 풍경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쩌면 김씨는 자신이 그 특집의 필자였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 국정화는, 무슨 낯 뜨거운 음모를 꾸미는 것도 아닐 텐데, 이름을 감춘 필자들이 짧은 시일 안에 집필을 끝낸다고 한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말이나 말았으면 덜 부끄럽겠다.

다른 한편, 국정화는 역사에 대한 특정인의 편견을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동원해 온 국민에게 주입시키려는 시도라는 데도 문제가 있다. 신정(神政)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시대착오로서, 북한의 유일수령체제나 삼대세습에 버금가는 국제사회의 조롱거리일 것이다. 게다가 역사를 보는 눈 자체가 독창이 아니라 딴 데서 풍월로 배워온 것이다. “일본의 전후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고 일본인의 긍지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일본인은 대대손손 사죄하도록 운명지어진 죄인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냉전 종결 후에는 이 자학적 경향이 더욱 강해져 현행 역사교과서는 과거 적국의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사실인 양 기술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후소사 교과서를 만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이다. “현 역사교과서는 우리 현대사를 정의롭지 못한 역사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발언은 일본 우익의 자학사관을 그대로 빼온 것임이 한눈에 명백하다. 일본 도쿄대학의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역사/수정주의>(김성혜 옮김·2015)에서 후소사 교과서의 지적 배경인 역사수정주의가 전쟁과 식민지배 같은 과거의 범죄에 대한 일본의 ‘망각의 정치’에 관계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박근혜의 역사수정주의는 1970년대 유신독재의 기억을 현실 속에서 재생시키려는 정치적 저의의 작동이라는 점이 대조적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 정권에 의해 만들어질 국정 역사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 물론 집필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다 집필계획조차 아직 성안되지 않았을 터이므로 교과서의 내용을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되어온 경과로 미루어 이른바 뉴라이트라고 하는 학자들의 관점이 교과서에 관철될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흔히 ‘식민지 근대화론’ 내지 ‘대한민국 건국설’ 따위로 일컬어지는 이론이 그런 것들인데,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체성의 점유투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풀어서 말하면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워졌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지켜야 할 국가적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누가 어떻게 싸웠고 어떤 희생이 치러졌는가에 관한 역사적 논쟁이다.

이 논쟁은 외관상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둘러싼 싸움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여러 층위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동반한 현실적 권력투쟁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가령, 1930년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미곡이 대량 반출된 현상을 한 사람은 ‘수출’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수탈’이라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논리의 싸움, 용어의 싸움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순히 계량경제학의 쟁점이 아닌 것이다. 동시대의 한반도 농민들 다수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채 만주에서 들여온 좁쌀로 겨우 곯은 배를 채워야 했던 고난의 상황을 미곡반출 현상의 해석에서 배제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또 쌀의 생산·수확·반출에 이르는 전 과정에 식민지 당국의 행정권력이 개입했던 사실을 외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그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시 지주의 후예들은 오늘날 대부분 중산층 내지 지배층으로 변신해 있는 반면 직접 생산자였던 농민들 후손은 여전히 땅에 묶여 있거나 도시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그 과거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거칠게 말하면 그와 같은 모든 연관성을 배제하고 즉물적 성장만을 계량화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연구자들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연원은 19세기 말 만민공동회 운동에까지 소급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서희경 지음·2012)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만민공동회의 정신을 계승한 삼일운동은 조선 말기의 계급적 분열을 민주공화주의에 의해 통합한 혁명운동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실로 수십년에 걸친 투쟁의 역사적 소산이었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의 체계 및 용어, 기본원칙, 이념 등에서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 헌법적 연속성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임시정부 헌법의 계승이다. 이 엄연한 맥락을 부인하고 1948년의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본연의 자유민주주의로 돌아와야 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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