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0905891. 이 숫자에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뒤에서부터 읽어야 풀 수 있다. 1985090524. 이 숫자는 1985년 9월5일 자정을 가리킨다. 1983년 출범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국가가 고용한 고문기술자들에 의해 육체와 영혼이 유린당하던 악몽의 시간을 의미한다. 5시간에 걸친 잔인한 파괴였다. 그날 그 시각, 민주주의는 그곳에서 질식사했다. 그리고 그날 그 시각 이후에도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비롯해 죽음의 행렬이 멈추지 않았다.
‘남영동’이 다시 부활하려는 조짐인가. 지난주 광화문 시위를 이슬람국가(IS)의 파리 테러에 비유하는가 하면, 대테러 방지법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라. 김근태의 삶을 소설로 복원한 방현석의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2012)에 등장하는 남영동 고문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을 차마 정시하지 못했던 독서 경험이 떠오른다. 문제는 이제 또다시 그런 참담한 시절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대책 없이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가을비가 한두 차례 긋고 난 뒤여서인가. 날씨도 점점 추워진다. 세상은 어지럽고, 날이 갈수록 어두운 세상에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일은 어려워지는 것만 같은데, 바람에 지는 가을 단풍은 왜 이리 아름답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이 시대는 아름다움이 죄가 되는 시절로 기록하고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지는 단풍을 보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는 내 마음의 상태는 필시 병든 상태임이 틀림없다. 저 동토(凍土)의 겨울공화국을 연상시키는 이 나라의 나쁜 기상도를 생각하면 얼마나 긴 겨울의 시간을 견뎌야 할지 걱정부터 앞선다.
무슨 묘수가 없을까. 오직 무력(武力)의 힘을 신뢰하는 저들 앞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의 힘을 끝까지 신뢰하며 지독한 무력(無力)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민정신이 필요하다. 김근태 4주기를 맞아 서울시청 내 시민청 갤러리에서 열리는 추모전시 ‘포스트 트라우마’(Post Trauma)에서 본 김월식의 작품 <받침 없는 섬 나여도>가 기억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여도’는 ‘남영동’에서 받침을 모두 뺀 표기인데, 고문 희생자가 ‘나여도’ 괜찮을까 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분단체제를 ‘오작동이 작동인 상태’로 파악하는 노순택의 <분단인 달력>, 임흥순의 비디오 작품 <북한산>, 조습의 <겨울골짜기>는 우리 사는 곳이 겨울공화국임을 환기한다.
김근태의 삶을 바꿔놓은 사건은 전태일의 죽음이었다. 1970년 11월18일, 장례식 당시 김재준 목사가 추도사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 ‘포스트 트라우마’전은 김근태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만은 아닐 것이다. 김근태와 더불어 민청련을 이끈 김병곤, 이범영, 이을호 제씨의 자녀들이 전시에 참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전시 제목을 트라우마가 끝난 상태를 뜻하는 ‘포스트 트라우마’라고 명명한 데에는 역설적 의미가 숨어 있다. 트라우마라는 말 앞에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당당히 붙이는 그날은 어떻게 오는가. 당신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세상은 결코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법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양심적 행동이 요청된다. 포스트 트라우마는 그렇게 가능해질 것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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