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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디지털 툴, 그 불편한 기대 / 김병익

등록 2015-10-29 18:51

‘밑으로부터의 감시’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SNS는 55년 전 4·19를 체험한 내게 여전히 매력적인 위력으로 보였다. 그래 왔기에 나는 전통의 아날로그 문화가 지닌 낯익은 미덕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면서 새로운 디지털 문명의 신기한 기기들에 두려운 기대를 갖는 듯하다.
지난 10월 초에 열린 북시티 출판포럼에 발표를 청탁받으면서 먼저 떠올린 주제는 종이책의 운명이 새로운 디지털 문명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란 문제였다. 물론 이 질문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20여년 전 컴퓨터로 글 ‘치기’를 익혀가면서 원고지에 펜으로 쓰던 문장과, 자판과 모니터의 새로운 도구로 만드는 문장 사이에 어떤 문체적 차이가 생길지 자문하며 그것이 문학 행위에 일으킬 영향에 대해 나름의 독학자적 고려를 해왔기에 컴퓨터 세계에 대한 생각도 그 연장선에서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중 하나가 인류사에서 가장 문명화된 20세기에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이념적 문제로 오히려 수천만권의 책들을 ‘갱유하듯 분서’했는데 21세기는 다른 이유로 종이책을 학대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그 이유가 새로운 밀레니엄에서는 사상적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해마다 새로이 나타나는 에스엔에스(SNS) 때문이었다. <고양이 대학살>로 유명한 미국 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하버드대 도서관이 효율적인 보관과 관리를 위해 마이크로필름화한다며 숱한 책들을 찢어 파괴한 일에 대해 깊이 탄식한 바 있지만, 새로운 디지털 문명이 종이책이나 인쇄문화를 제척하거나 홀대하는 새로운 반문화적 사태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종이책에서 비종이책으로의 전화를 비판, 거부만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시스템을 사용하며 그 편의를 즐기고 있고 그것이 앞으로의 일상생활의 대세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디지털 세계에 대한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에 상당히 동의하고 있었지만, 대영백과사전이 전자화되고 주간지 <뉴스위크>가 웹진으로 간행되며 우리 자식 또래, 언론학을 전공한 딸이 인터넷에서 뉴스를 접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쇄기가 발명되어 급속하게 번지던 15, 16세기에 많은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이 책이란 새 형태의 문화매체를 상당히 강하게 비판했고 더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도서관이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제 인간의 두뇌는 참 게을러지겠다고 탄식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비종이책’에 대한 내 기피증이 시대의 진전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꼴통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실증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구해 읽은 것이 디지털 문명에 비판적인 마크 바우어라인의 <가장 멍청한 세대>와, 반대로 새로운 사이버 문화에 적극 동의하는 클라이브 톰슨의 <생각은 죽지 않는다>였다.

바우어라인은 영문학 전공 대학교수로 아마 전형적인 인문학자인 듯하고, 톰슨은 디지털 전문지인 <와이어드>에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책 제목도 앞의 것은 원제 그대로이지만 뒤의 것은 ‘당신이 생각하기보다 스마트한’이었다. 미래에 대한 숱한 전망들이 으레 그렇듯 이 두 책은 디지털 문명이 가져다줄 인간의 지능과 정신, 삶과 사회에 대한 비관과 낙관이 마주 부닥치고 있었다. 바우어라인은 디지털 시대야말로 “청소년을 소셜 그룹과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하고 이는 젊은이의 지적 발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말로 이 책을 열고 있고, 톰슨은 체스 게임에서 컴퓨터가 세계 챔피언을 이긴 사실을 소개하고 오히려 “컴퓨터의 전술적 예리함과 인간의 전략적 지침이 결합하면 놀라운 실력이 나온다”며 “새로운 툴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지까지 결정한다”는 경기 참가자의 소감을 소개함으로써 문명이 만든 기술과 인간의 두뇌가 결속할 때 최상의 성과가 나온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처음부터의 이 상반된 판단에 이어, 두 저자는 전통문화와 신기술의 가치와 장점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컴퓨터, 에스엔에스 등 디지털 문명 도구들이 가하는 영향, 특히 인간의 지능 개발과 사회발전에 줄 효과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가령 바우어라인은 모니터의 이미지를 통한 교육과 정보 전달이 사람들의 사용 어휘 수를 대폭 줄이고 그래서 사유를 상투적으로 고착시키며 물질적 풍요가 청소년의 지적 발달에 저해요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비슷한 사태를 놓고도 톰슨은 스마트폰, 하드디스크 등 갖가지 디지털 도구가 엄청난 기억들을 소장하고 그 기억들의 상호 복합적인 시너지 효과를 유발해 더욱 풍부한 상상력과 위키피디아에서 보는 것 같은 참여적 역동성을 가진다고 평가한다. 인간 지식이 머릿속이 아닌 웹사이트에 더 많이 기록될 뿐이고 문화의 성장은 디지털 기기의 발전일 뿐이며 문자적 지식은 휘발성이 강한 텅 빈 두뇌로 만든다고 바우어라인이 공격하면, 톰슨은 두뇌의 망각이 지닌 유용성을 강조하고 컴퓨터는 그 기억의 불확실성을 수집해 ‘재형성’(re-membering)하여 새로운 지성과 상상력으로 창조력을 키운다며 그 풍요한 생산력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가 칭찬하는 것은 1981년 메모리 1기가바이트가 약 30만달러였지만 지금은 몇 푼으로 살 수 있다는 지식의 염가화이다. 하긴 구술에서 필사로, 거기서 인쇄로, 그리고 벽돌에서 양피지로, 거기서 종이로의 책의 제작과 형태가 발전하면서 가격이 싸지고 리프킨이 말하듯 ‘한계생산비의 제로화’로써 문명과 문화의 창조, 보관, 전수 비용이 엄청 줄었기에 현대적 삶의 풍요와 편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대조적 관점을 보는 나는 문외한답게,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바르다는, 그래서 뒤에 들은 말에 이번에도 더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가운데 오늘날 ‘밑으로부터의 감시’가 가능해졌다는 톰슨의 지적에 무릎을 쳤다. 벤담이 구상한,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수감자들을 감독할 수 있는 전방위적 관찰력을 발휘해주는 판옵티콘에서 조지 오웰의 ‘빅 브러더’, 그리고 오늘의 중앙정보국(CIA)에 이르기까지 감시 행위는 늘 위에서 독점적으로 감행되는 권력의 소유였다. 그러나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 등 현대의 디지털 세계에 만연한 기기들이 이제 밑에서 위를 감시할 수단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위에서의’ 감시(‘sur’veillance)에서 ‘아래에서의’ 감시(‘sou’veillance)가 가능해짐으로써 민주주의 실현의 적극적인 수단을 민중이 획득했다는 사실은 눈부신 전망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랍의 봄’을 불러온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트위터에서 비롯했고 그 혁명 지도자들은 올해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미국 정보기관의 내부 폭로자로 러시아에 망명한 스노든이 “당신이 산 스마트폰이 당신 것이 아니며 여전히 정보기관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다”고 폭로했지만, 그럼에도 ‘밑으로부터의 감시’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에스엔에스는 55년 전 4·19를 체험한 내게 여전히 매력적인 위력으로 보였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그래 왔기에 나는 전통의 아날로그 문화가 지닌 낯익은 미덕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면서 새로운 디지털 문명의 신기한 기기들에 두려운 기대를 갖는 듯하다. 이런 문화접변의 양가(兩價)적 인식이 인류사적 전환인지 진화인지 내 지적 능력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실감되는 것은 인류는 진보하지만 인간은 늘 그만그만하다는, 톨스토이식 회의론이다. 내 어렸을 때처럼 한 시간 걷는 일이 즐거울 수 있고 지금처럼 자가용으로 10분 만에 도착하더라도 그 교통체증에 더 큰 불평을 터뜨리는 것처럼, 인류의 진보와 인간의 행복은 그 관계가 단순치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갖가지 새 네트워크 서비스에 대해 정작 그 사용법을 모르기에 그 힘을 높이 평가하는 이런 내 무식한 역설이 외려 자연스럽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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