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불똥 화가의 그림은 항상 가슴을 후벼 판다는 느낌이었지만 그의 글도 촌철살인이다. “…휘-망은/ 늘/ 희파람처럼/ 짧게 날아왔다가/ 미처 창문열고내다보기도전에/ 태산으로 버티고 선 절망속으로/ 표로롱/ 사라져버리는/ 작은새한마리.”(<모순 속에서 살아남기>·현실문화 펴냄) 말장난을 섞은 그 글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마음을 굳힌다.
목이 탄다. 가물어서 강바닥이 드러난 것을 보다가, 감농사로 먹고사는 영동지방에서 감이 줄줄이 떨어진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다가, 새벽에 지하도 구석구석에서 즐비하게 잠자고 있는 세대불문 남녀불문 노숙자들의 행태를 유심히 살피다가 목이 타올랐다. 노년 장년의 자살 소식이 연이어 들리고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는 지금,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것이 그렇게도 다급한 일인가. 국사교과서를 바꾸면 이런 문제가 일시에 해소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살기 바빠 그까짓 국사교과서가 어찌 되건 관심도 없는 대다수 국민들의 형편을 오히려 이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아베 정권이 안보법안을 통과시키고 잇달아 방위장비의 조달과 기술개발 수출을 연계하는 군·산·관·학이 하나가 되는 방위장비청이라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었다. 오래된 경제침체를 아베노믹스로 돌파하려 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판명난 시점에 군수산업으로 경제적 효과를 얻으려는 것 아닌가 의구심까지 든다. 일본 안보법안의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것은 타국에 대한 공격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북한과 대치할 때 미국의 비호 아래 일본 자위대가 이 땅에 건너와 그들과 손잡고 그들이 개발한 무기로 북한과 싸울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상상을 하면 또 목이 탄다.
인간의 가장 불가사의한 점을 가족관계에서 느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삼시세끼 같은 밥을 먹으며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교과서와 같은 책과 같은 영화를 보며 자랐는데 왜 형제들이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컸는가라는 점 때문이다. 어떤 대통령을 찍은 손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그를 찍었음이 분명한 아들과 동생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형제도 있고, 어떤 형제는 전화할 때마다 “여보세요” 대신 “할렐루야”라고 소리친다. 왜 인풋은 같은데 아웃풋은 다른가라는 숙제는 결국 기질과 성격의 차이, 나아가 유전자의 차이 등 미궁 속으로 빠져들다가, 그래서 인간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각기 다른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이 획일적인 교육을 한다고, 받는다고 해서 절대로 똑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한 가정의 식구들이 그럴진대 한 사회, 한 국가도 같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같은 교육을 받아도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남과 북이 그렇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북한처럼 전 국민이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말만을 수십년째 되풀이하는 게 그렇게도 부러웠던 것인가. 겉으로만 그렇지 내심으론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이 많을 텐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가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는 사회라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자기가 배우고 자기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 온통 이 나라의 윗자리에 앉아 있다. 진리란 영원불멸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학문에 근접해본 사람이라면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매사에 이게 과연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살피고 바꾸려는 동력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진전시키는 것이다.
전임 대통령은 주특기를 살려 임기 동안 전 국토를 4대강 토목공사로 뒤집어 놓았다. 그것으로써 대통령의 사명을 끝냈다. 현 대통령은 일본 육사를 나오고 천황을 위해 혈서를 쓰고 한때는 남로당원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리고 성공한 쿠데타를 했다는 아버지의 개인사를 우리 역사의 ‘올바름’으로 바꾸어놓고 싶어하는 일념으로 대통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이 창문 앞에 왔다가 사라지는 작은 한 마리의 새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잡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계속 목이 탄다.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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