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정토(苦海淨土)의 글쓰기라고 해야 할까.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와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의 소설 <신들의 마을>을 보며 내 머릿속에서 순간 이 표현이 떠올랐다. ‘고해’ 같은 세상에서 ‘정토’를 꿈꾸는 글쓰기를 온몸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의 유전자를 지닌 것만 같다. 재앙에 가까운 파국적 근대가 낳은 끔찍한 대재난 앞에서 두 작가는 근대극복의 글쓰기를 철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시무레 미치코는 1950년대 중반 일본 미나마타 지역에 발생한 미나마타병이라는 공해병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무하는 진혼의 문학을 보여주었다. <신들의 마을>은 <고해정토>(1969)와 <하늘물고기>(1972)의 허리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고해정토’ 3부작을 이룬다. 미나마타병은 신일본질소주식회사 미나마타공장에서 ‘메틸수은’ 화합물을 아무런 처리 없이 바다에 방류해 오염된 어패류를 먹은 사람들 및 동물들이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죽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환자 수가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1927년생인 이시무레 미치코는 당시 새댁티를 벗지 못한 무명작가였다. 사건 이후 그녀는 희생자들의 ‘곁’을 수십년 동안 지키며 수많은 죽음과 모진 삶을 목격하며 다다미 반장만한 작은 서재에서 3부작을 썼다. 병원 기록, 신문 기사, 청원서, 격문 같은 온갖 자료들을 배합해 ‘신들의 마을’에 살던 미나마타 사람들의 못다 한 삶과 부서진 욕망을 복원해냈다. 이른바 ‘미치코 방언’이라 불리는 민중 방언과 감각으로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가치들을 실감 있게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신일본질소주식회사로 대표되는 근대의 힘과 질서는 신들의 마을을 파괴하고, 그곳 주민들을 함부로 모욕했다. 흙탕물을 튀기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트럭 행렬이 잊히지 않는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간소한 상복의 옷자락이나 가슴께에도, 위패에도, 한상 차려진 공물에도 가차 없이 흙탕물이 튄다.” ‘공해 인정’을 하지 않으려는 국가 관료기구와 기업 이름을 바꾸며 책임 회피하는 시장(기업)의 모욕도 멈추지 않는다.
훗날 총리가 된 젊은 후생성 사무차관 하시모토 류타로의 오만한 태도는 국가 관료집단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는 행정의 희열을 느끼고자 한 걸까. 주민들은 “공무원밥을 먹으면 구더기가 된다지만, 구더기만 한 정신도 못 되는 사내였구먼”이라고 일축한다. 사고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피해자들과 직접 대면한 회사 사장의 무책임한 태도 앞에서는 실소가 나온다. 이시무레 미치코는 국익을 운운하고 번영을 구가하며 민중들의 삶을 철저히 짓밟는 근대(국가/시장)의 본질에 대해 추궁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신일본질소주식회사의 뿌리가 옛 식민지 조선의 함경도 함흥군 운전면 호남리 바닷가에 세워진 공장이었음을 파헤치는 그녀의 집요한 글쓰기에서 ‘근대의 저주’를 넘어서고자 한 작가의 분투를 엿보게 된다.
이 태도는 백무산이 세월호 이후 쓴 시에서 “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패닉>)고 한 언술과도 통하는 것이리라. 그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정지의 감각’(<낙화>)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근대극복으로서 ‘탈성장’의 문법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쓴 벨라루스 출신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수상했다. 미처 작품을 읽지 못했으나, 재난 상황에서 문학적 응전의 기록을 보여준 작가인 것 같다.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하며, 백무산이 “지속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것들 / 핵발전 시대 이후 혁명은 꿈도 꿀 수 없다”고 쓴 표현을 음미한다. 국가와 자본은 재난 이후에도 ‘모든 것은 예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힘에 맞서는 문학(예술)적 상상력은 재난의 상상력이라는 점을 말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국문학에는 고해정토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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