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한국어문기자협회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여했다. 김하수 전 연세대 교수와 오새내 계명대 교수 등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쓰기’에 관해 주제발표를 했다. 신문사 교열 담당 기자와 방송사 아나운서들이 모인 언어전문 기자 단체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언어 개선 운동 과제로 검토해보는 자리였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영어권에서 비롯된 말이다. 온라인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것을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차별받는 그룹을 배제하거나 하찮은 존재로 만들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표현이나 행동을 피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개념은 1793년 미국 연방 최고법원이 ‘치점 대 조지아주 사건’을 다룰 때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법원은 건배사에서 “인민을 위하여”라는 말 대신 “국가를 위하여”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 이유는 국가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창조물이지만 인간은 신의 가장 숭고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가보다 인민이 더욱 숭고하다고 본 점도 흥미롭다.
이 개념은 진보의 물결이 휩쓸던 1960~70년대 미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다. 젊은 케네디 대통령의 집권을 전후하여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 여성해방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될 때였다. 비틀스의 음악은 청년문화를 선도했다.
운동가들은 언어가 공정하지 못함을 발견하고 개선을 부르짖었다. 체어맨이나 포스트맨에서 맨이라는 남성 표지를 떼어내고 체어퍼슨, 포스트퍼슨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냈다. 맨카인드라는 말은 휴머니티로 바꿨다. 흑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바꿨으며, 아메리칸 인디언은 토착 아메리카인으로 부르도록 했다. ‘불구자’는 ‘장애인’으로 바꿨다가 ‘능력을 달리 타고난’ 사람으로 언어 배려 수준을 더욱 높였다. 인종, 민족, 젠더를 둘러싼 사회 갈등에 대해 미국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 개념을 우리의 언어 개선 운동에 적극적으로 써먹자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는 공적 말하기를 비평하려 해도 변변한 잣대가 없다. 국어순화 운동이나 외국어 대신 우리말 쓰기는 필요하지만 범위가 좁다. 정치인의 언어를 평가할 때 흔히 막말 담론을 동원하는데 이것처럼 허망한 게 없다. 수많은 기자회견과 연설을 통해 폭포수처럼 많은 말을 쏟아내어 결과적으로 국정 정보 제공량이 많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막말 주범으로 전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거의 하지 않고 가끔 담화문이나 발표하니 국민들은 국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신사숙녀’로 평가받으니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툭하면 종북, 좌빨 따위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적 말하기 차원에서 가장 나쁜 행동이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억누르는 짓이다. 이런 행동을 당연히 강력하게 규탄해야 하는데 “구태의연한 색깔론” “냉전시대 구습” 따위로 비판해 갖고는 힘이 덜 느껴진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당신은 정의롭게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비판해보면 어떨까?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 비로소 움찔하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운동가들은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전쟁 기간에 전쟁이라는 단어 사용을 기피한 것을 비판했다.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가 프랑스와는 독립적인 하나의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이유로 전쟁이란 말을 피했다. 언어는 정치적 힘을 갖는다. 언어를 누가 정의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유럽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언어의 차별 요소를 없앴을 뿐 아니라 대안적 시각, 다양성, 다문화와 ‘윤리적인 삶’이라는 가치관을 퍼뜨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우리도 정치적 올바름 개념을 다듬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박창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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