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이 구호처럼 유구한 표어가 있을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구월이 오면 한 번쯤은 누구나 이 말을 접할 것이다. 독서 행사도 곳곳에서 열린다. 평소 독서인을 자처하는 나 또한 구월에 독서 행사에 두어 차례 참여했다. 기억에 남는 행사는 지난주 끝난 ‘군포독서대전’과 수원 화령전 앞에서 열린 ‘휴먼라이브러리 수원’ 행사였다. 함께 읽기를 주제로 한 군포독서대전에서는 독서 동아리 활성화 토론회에 참여했고, 사람책을 주제로 한 수원 행사에서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인 미디어운동가 알 마문의 사연을 한 시간 동안 육성으로 경청했다.
이 중 나의 관심을 끈 행사는 독서 동아리 활성화 행사였다. 그날 주제발표에서 나는 우리나라 독서 동아리 활동이 모임의 ‘자폐성’을 극복하고, ‘실용성’ 위주의 책읽기에서 벗어나, ‘운동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문제제기를 했다. 물론 자족적인 모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수년 전 동네 책읽기 모임을 만들어 3년 남짓 운영하다 지금은 사실상 와해 상태에 이른 이유를 분석해보니, 모임의 ‘폐쇄성’이 문제였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한다. 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전국의 독서 동아리 모임의 경우 이른바 자기계발 서적을 비롯한 실용서 위주의 편중된 독서를 한다는 점이다. ‘책 읽는 도시 군포’를 표방한 군포시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지자체에서도 도서관 정책 차원에서 독서 동아리 활성화를 위한 여러 정책들을 펴고 있는 줄 안다. 그런데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운동성 측면에서는 아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함께 읽기’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저널리스트 티나 로젠버그는 함께 읽기의 기능 중 하나가 ‘또래압력’이라고 말한다. 동료 집단의 사회적 압력을 의미하는 또래압력의 긍정적 힘이 나의 정체성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공식·비공식의 수많은 또래 소모임을 관찰하며 내린 그녀의 결론은 또래 집단 특유의 ‘손잡고 나아가기’(Join-the-Club)가 핵심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독서 동아리에도 그런 활동을 하는 모임이 여럿 있다. 같은 자리에서 사례를 발표한 숭례문학당의 윤석윤 강사가 ‘책으로 다시 살다’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한 내용이 퍽 감동적이었다. 회사 부도와 사업 실패에서 자신을 구원한 것은 책과의 만남이었고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노라고 윤 강사는 ‘간증’의 언어로 증언했다. 한 마리 고치처럼 자신만의 사일로(silo)에 틀어박혀 지내던 모습에서 벗어나,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동료효과(peer effect)의 강한 힘을 느끼게 된 셈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각자도생의 윤리가 권장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모욕사회가 되어버린 ‘헬조선’에서 이러한 동료효과의 의미는 여전히 소중하다.
독서 동아리 모임은 자기 외부에 대해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 올해 초 어느 신문이 주최한 신춘문예 투고작들의 주소지 중 상당수가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014년 4·16 이후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앓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독서 동아리를 비롯한 지역 소모임들이 일종의 ‘사회적 힐링’으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임의 ‘형질전환’이 요구되는 셈이다. 그런 즐거운 고투와 노력의 과정들에서 우리의 앎이 우리의 삶을 구원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철학자 랑시에르의 유명한 ‘프롤레타리아의 밤’ 같은 개념은 프랑스 혁명 이전 노동자들의 책읽기가 사회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던가. 나는 요즘 ‘헬조선’ 대한민국에서 사는 일이 혁명 전야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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