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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조랑말 경주’의 비극

등록 2015-09-16 18:44

2010년 봄 무렵, 당시 야당의 주요 지도자들을 조랑말로 비유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대선 고지를 향해 뛰고 있는 주자들이 하나같이 준마는 못 되고 조랑말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본인들은 스스로 준마를 자처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 글은 야당의 지도자들을 조롱하려는 게 아니고, 야권의 정치적 거목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조랑말들이 함께 이끄는 야당’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5년 남짓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정치적 사건이 있었고 선수들의 면면도 많이 바뀌었다. 문재인·안철수·박원순 등이 새롭게 등장해 야권의 ‘빅 3’로 등극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서도 역시 걸출한 준마의 위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리더십, 카리스마, 대중의 지지도 등 모든 면에서 기껏해야 ‘조금 큰 조랑말’ 정도라고나 할까. 눈을 여당으로 돌려봐도 모두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행세깨나 하는 정치인들 사이에 ‘나라고 대통령을 못 할까 보냐’ 하는 인식이 어느 때보다 팽배한 것은 이런 상황 탓도 있는 것 같다.

조랑말들끼리의 경주라고 해서 흥미와 박진감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라이벌들끼리의 경쟁은 개인은 물론 정당 조직의 정치적 근력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축전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제대로 된 경주가 아니라 서로 할퀴고 뒷발질 공격을 하는 어지러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한 방향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는 것도 아니고 각기 동서남북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려가니 어디가 결승선인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니 관객의 손에 땀이 나지 않고 가슴에서 울화가 치미는 경주다.

요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을 보며 새삼 깨닫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만난다고 해서 꼭 ‘좋은 정치’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직성과 도덕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은 확실히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서 그리는 정치의 그림은 최악의 졸작이다. 이미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기묘한 엇박자로 실패를 자초하더니 그 증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큰사람’은 결코 아니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은 15일 저녁 어렵사리 만났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정작 당면 현안에서는 각자 할 말만 하고 헤어졌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런 식의 만남이 결실을 맺으려면 상대방에게 줄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 가는 게 고수의 자세다. 문 대표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대표 권위 인정’이다. 그렇다면 안 의원은 재신임 투표 취소만 주장할 게 아니라 투표 없이 문 대표가 재신임을 받도록 자신이 앞장서겠다는 식의 약속을 해야 했다. 문 대표 역시 안 의원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정치적 재기’를 위해 가시적인 선물을 마련해 내밀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도,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포용력도 없었다. 정치에 입문한 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문 대표는 끝내 ‘법률가’ 티를 벗지 못하고 있고, 안 의원의 행보에서는 여전히 ‘자연과학도’의 경력이 어른거린다. 이들이 ‘종합예술가’가 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먼 것 같다.

새정치민주연합이 16일 오후 중앙위원회를 열어 공천혁신안을 우여곡절 끝에 통과시켰으나 당의 장래는 여전히 암울하다. 문 대표가 재신임 투표를 강행해 통과된다 한들 당의 지지도가 갑자기 치솟고 대표의 리더십이 확고해질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큰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문 대표다.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알렉산더 대왕은 “사슴이 이끄는 사자들의 군대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가 더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은 모두 사자가 되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자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지금 야당은 천방지축 망아지들과 늑대, 여우가 득실거리는 곳이다. 큰 소리로 포효한다고 해서 밀림의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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