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 남북합의는 남북 군사충돌을 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남북 정상들의 발언에서도 그런 속내가 드러났다. 8월28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운명적인 시각에 화를 복으로 전환시킨 이번 합의를… 풍성한 결실로 가꿔나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9월1일 “어렵게 이뤄낸 이번 합의를 잘 지켜나간다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협력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8·25 합의에 이르기까지 남북 모두 노심초사했었다는 걸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 이행에 남북 정상들도 힘을 보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외교협상의 금언이 시사하듯, 좋은 합의를 해놓고도 후속 협상 때 작은 입장 차이 때문에 원합의가 이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남북대화에서도 단어의 해석 차이나 실무적 입장 차이 때문에 상위 합의가 결국 이행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장차 열릴 남북 당국회담 테이블에 올라올 악마들이 적지 않다. 합의 직후 우리 군부에서 터져 나온 ‘참수작전 계획’이나 ‘작계 5015’ 같은 것은 북측이 8·25 합의에 대한 우리의 진정성에 대해 시비 걸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실제로 8월27일 김양건 비서가 문제제기를 한 뒤 대남기구들도 나섰다. 그러나 회담이 열리기 전에 잘 처리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8·25 합의에 따라 열릴 남북 당국회담 벽두부터 북한이 강력 제기하고 나설 문제 중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 있다. 바로 대북전단 살포 중지 문제다. 전단 살포가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일 수 있지만, 북한에는 체제 문제이고 대남관계 인사들에게는 충성도가 판가름 나는 사활적 문제다. 그렇기에 작년 10월 초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가 핑계를 대고 북한 최고위급 간부들이 세 명이나 내려와서 전단 살포 중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 합의됐던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이 불발된 것은 우리 정부가 전단 살포를 중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열릴 남북 당국회담도 전단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말한 대로 어렵게 이뤄낸 합의를 잘 지켜서 긴장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협력의 길로 나가고 싶다면, 차제에 대통령 차원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시키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두 번째 악마는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앞두고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다. 북한은 물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장거리 로켓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미국은 그걸 장거리 탄도미사일로 보고 바로 유엔 차원의 제재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도 동참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순간 8·25 합의는 없던 일로 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자신이 말한 대로 운명적인 시각에 화를 복으로 전환시킨 합의를 풍성한 결실로 가꿔나가고 싶다면, 김정은 위원장은 8·25 합의를 깰 것이 분명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자제해야 한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한반도 내 사드 배치 명분만 강화시켜줄 뿐이다. 북한의 안보에도 부담이 된다.
세 번째 악마는 5·24 조치 해제 문제다. 지난 5년 동안 북한은 5·24 조치의 무조건적인 해제를 요구해왔다. 반면 우리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시인, 사과, 재발 방지를 북측에 요구해왔다. 그런데 8·25 합의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려면 5·24 조치를 해제해야만 한다. 8·25 합의 과정에서 지뢰 폭발에 대한 유감 표명과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을 맞바꿨듯이 천안함 사건과 5·24 조치도 세트로 묶어서 풀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임기 후반부에라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협력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8·25 합의 이행 과정에서 악마 노릇을 할 사안들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정공법을 쓰지 않고 꼼수로 우회하려 하면 남북관계는 발전 못 시킨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