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근무했던 어느 외교관이 들려준 얘기다. 미국 하원의원과 점심을 먹고 서울에서 오는 지인을 마중하러 덜레스공항으로 차를 운전해 가려는데, 그 하원의원이 ‘괜찮으면 공항까지 좀 태워달라’고 했다. ‘운전기사가 휴가냐’고 묻자 그 의원은 ‘정책보좌관을 더 쓰려 운전기사를 고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더란다. 직접 차를 몰거나 필요하면 택시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개 운전기사(수행비서)를 9급 또는 7급으로 채용하니, 국회의원이 직접 차를 몰면 같은 직급의 정책보좌관을 한명 더 쓸 수가 있다. 이런 의원을 본 기억은 없다. 물론 저녁 약속이 잦고 지역구 행사가 빈번한 우리 현실을 미국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모자라면 예산을 증액해서라도 보좌관을 늘리려고만 하지 스스로 고통을 분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게 우리 국회의 모습이다. 그렇게 늘어난 보좌관이 지금은 의원 한 사람당 인턴까지 포함해 9명이다. 의원실 공간이 부족해 몇 년 전엔 수천원억을 들여 넓은 평수의 제2의원회관을 새로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불신하고, 비아냥거리고, ‘그놈이 그놈’이란 생각을 버리질 않는다.
정치개혁이 항상 실패하는 근본 이유도 여기 있다. 교수·기자와 같은 전문가 집단과 일반 국민의 의견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사안이 ‘국회의원 수’다. 대다수 정치학자들은 대표성 강화를 위해 의원 정원을 늘리고 비례대표 의원 수도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인구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우리의 적정 국회의원 수는 360명 안팎(현재 300명)이란 연구결과도 여럿 있다. 하지만 지금 국민 정서로는 국회 의석을 단 한 석이라도 늘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의원 수가 늘어나면 국회의 특권만 커질 거란 불신 때문이다.
이런 여론 구조는 대통령의 제왕적 독주를 용인하는 배경이 된다. 대통령이 아무리 독선적이고 무능해도 항상 국회보다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정치 상황에선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가 작동할 리 없다. 그러니 노회한 대통령은 국회와의 싸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지렛대로 활용한다. 숱한 비판 속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압도하고 여당을 장악할 수 있는 건 이런 정치적 관계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야당의 혁신 작업은 너무 울림이 없다. 혁신위가 두 달 넘게 활동하며 수차례 혁신안을 냈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정치개혁의 내용에만 집중했지 그런 개혁을 국민이 믿고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진 못한 탓이다.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게 혁신의 기반이다. 그러려면 정당과 국회의원이 갖고 있는 특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말뿐인 선언만으론 국민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2012년 대선 직전 여야는 국회의원 세비 30% 삭감을 경쟁적으로 공약했다. 그러나 현 국회의원 세비는 18대에 비해 20%나 올랐다. 지난해 2월 이종걸 의원 등은 국회의원 수당의 사용내역을 공개하고 공항 귀빈실 이용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회의원윤리실천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1년 넘게 국회 운영위에서 잠자고 있다. 이래선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아무리 외쳐도 “또 선거가 다가왔구나”란 힐난만 받을 뿐이다.
먼저 실천해야 한다. 야당은 윤리실천특별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입법해야 한다. 법안 대표발의자인 이종걸 의원은 마침 야당의 원내대표다. 여당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여든 야든 내부 윤리규정을 강화해 불필요한 외국순방이나 취업청탁 관행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년 총선에선 특권을 먼저 내려놓는 쪽에 국민 마음이 쏠릴 것이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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