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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애국이냐, 국뽕이냐 / 문강형준

등록 2015-08-14 18:54

광복 70년을 맞아 온 나라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광화문과 명동에는 십수 미터짜리 대형 태극기가 약속이나 한 듯 빌딩 중앙을 도배하고 있고, 거리에는 태극문양 가로등이 걸려 있다. ‘태극기’는 하나의 기호다. 이 기호는 누가 어떻게 쓰느냐, 어떤 상징을 담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될 수 있다. 똑같은 태극기가 민주주의의 기호가 될 수도 있고, 독재정권의 기호가 될 수도 있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는 모두 태극기가 등장하지만, 그 사건들을 보는 입장은 언제나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친일파 척결 실패, 독재자 단죄 실패, 좌파에 대한 혐오, 냉전주의적 반북감정 등으로 인해 한국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똑같은 의미를 담아 태극기를 흔든 적이 없다. 우리는 단죄 없는 역사, 합의되고 정리되지 못한 역사, 그래서 이제는 저마다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취향’이 되어버린 역사를 살아가며 저마다의 태극기를 흔든다.

지금 광화문과 명동에 펄럭이는 ‘태극기’는 이 뒤틀린 역사의 균열을 ‘애국심’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덮어버리는 일종의 가림막 같은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제대로 심판하는 일은 너무나 ‘근본적’이고, 그래서 불편하기에, 권력은 그저 태극기를 진열해 ‘대한민국은 위대하다’고 외칠 뿐이다. 역사는 불편하지만, 태극기는 편하다.

1000만 관객을 향해 달리는 영화 <암살>과 <베테랑>의 시원함 뒤에는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재가 가시처럼 걸려 있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라는 역사, 무소불위의 자본이라는 현재. 영화는 친일파를 직접 처단하는 독립운동가와 재벌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형사를 그리며 시원함을 주지만, 악의 처단자로서의 독립운동가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형사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실제로 가져보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화는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을 상징적 영역에서라도 가능케 해주며 시원함을 주는 대중적 판타지다.

이 두 영화와는 달리, 거리의 태극기 물결은 상상도 재미도 주지 않는 판타지다. 오로지 갈등과 균열을 덮어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이 태극기 판타지는 현실을 ‘그냥’ 잊으라는 명령이다. 힘든 현실을 헤쳐나가지 않고 그냥 잊고 덮기 위해 필요한 게 마약이라면 오늘 광화문과 명동의 태극기는 정확히 마약과 같은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은 한 재벌가 회장의 특별사면과 그 재벌이 소유한 회사 빌딩에 붙은 대형 태극기가 바로 그런 마약이다. 그냥 잊고 덮기 위해 필요한 태극기.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국뽕’이라는 말은 태극기의 이 판타지 같은, 마약 같은 기능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영화가 상영되는 씨지브이(CGV)극장 광고에서도 태극기는 펄럭인다. “국민의 90%가 국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 세계 빈곤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나라. 기름범벅이 된 바다를 위해 100만명의 자원봉사자가 달려가는 나라. 반세기 만에 GDP를 750배 성장시킨 나라. 700만이 광장에 모여도 단 한 번의 사고도 없던 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 진지한 광고 속엔 국가가 해낸 것만 있고, 하지 못한 것은 없다. 이 광고는 이렇게 다시 쓸 수 있다. “친일파와 독재자가 여전히 떵떵거리는 나라. 권력자의 자녀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의 노동시간과 자살률을 자랑하는 나라. 기름범벅을 만든 재벌을 처벌하지 못하는 나라. 304명이 바다에서 죽어도 진실규명이 되지 않는 나라.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벌금폭탄으로 응징하는 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유일한 나라.” 태극기가 펄럭이는 이때, ‘국뽕’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국가의 이면을 같이 볼 것을 요청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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