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은 어쨌든 정보공작과도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박진목씨 같은 경우의 케이스 스터디도 필요하리라 본다. 박씨는 수수께끼는 남겼지만 우국지사임에는 틀림없다.
식민지, 남북분단, 전쟁-한반도 역사의 격류 속을 살아온 우리 동포 가운데는 기구한 삶을 산 인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인물 가운데 그 참으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대표적 인물이 박진목씨.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을 능가한다 하겠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교훈도 평화와 통일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가 쓴 <북의 시인>(문고판, 1974)이라는 시인 임화에 관한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혔다. 그 소설의 말미에 북한 정권의 남로당 관련 이승엽·임화 등의 재판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런 부분이 있다.
“피고 이승엽은(…) 절단된 노블과의 스파이 연락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최익환·박진목을 활동시킨 결과, 박진목이 1951년 7월 피고 이승엽에 전달하는 노블의 새로운 지령을 받고 입북하였다.” 그에 앞서 이런 설명이 있다. “피고 이승엽은 1947년 5월부터 미국 국무성의 촉탁, 당시는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관 존 H. 하지의 최고 정치고문인 노블과 직접 연계되어 그 후 그의 지시에 따라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내가 박진목씨를 알게 된 것은 <북의 시인>을 읽은 뒤였다. 그는 <내 조국 내 산하>라는 두툼한 자서전을 냈고, 그 뒤 그 축소판 격인 <민초>라는 얇은 책도 냈다. <민초>의 출판기념회에 가보니 놀랍게도 김영삼·김대중씨 등 야당의 거물 정객도 보였다.
박진목씨는 독립운동가로 옥사한 형님과 연루된 일로 해방되기까지 1년2개월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관계하게 되고 남로당에 연결된 모양이다. 경북 의성 출신이지만 달성군의 남로당 책임자를 지냈고 경북도당의 부장으로도 활동했으니 거물급임에 틀림없다. 그러다가 남로당의 폭력투쟁노선에 반기를 들고 남로당을 떠났다는 것이다.
6·25가 났을 때 그는 서울에 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미군정 시절 민주의원의 의원을 지낸 최익환씨를 따라 정전운동을 하러 나섰다. 남로당 조직의 선으로 이승엽을 만나게 된다. 이승엽은 그때 법무상을 겸한 서울시 인민위원장이다. 1951년 1월25일 서울시 인민위가 쓰고 있는 보성중학교 입구 어느 2층 집에서 이승엽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인품이 원만해 보이고 얼굴은 좀 검은 편이고 그 호탕한 웃음은 만만한 인물이 아닌 것같이 보였다.” 이승엽은 말하자면 박헌영 다음의 남로당계 제2인자인 셈이다. 이승엽에게 정전할 것을 건의하고 그가 공감하자 남쪽 정부 쪽에 그렇게 설득하기로 한다. 최익환·박진목은 피난 수도 부산으로 가서 한국 정부와 미군 측에 줄을 대려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하지 장군의 정치 고문을 지낸 이용겸씨다. 이용겸씨는 하지 장군을 위해 일할 때 민주의원을 출입하며 최익환씨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용겸씨의 주선으로 “외교관인지 정치인인지 모를” 미국인을 만나 51년 7월28일 박진목씨는 북행을 하게 된다. 7월10일 휴전회담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니 그 직후의 일이다. 미군 대령이 길잡이를 해주고 미군 장교가 운전하는 지프차로 전선으로 가서 걸어서 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곡절 끝에 이승엽을 만나게 된다. 평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이승엽을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절반은 폭격에 무너진 기와집이었다. 산기슭인데 집의 둘레가 위장에 싸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마루를 지나 안내하던 사람을 따라 안방에 들어가니 이승엽이 아랫목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악수로 맞아주면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 이승엽은 나를 보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군사령관의 신임장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박진목씨였다. 두번째 만남은 평양 시내에 있는 “상상조차 못하리만큼 큰 방공호 안”에서다. 배석했던 사회안전성 간부는 “미군 정보기관원이 마치 미국대사관원인 것처럼 속여 보낸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이승엽은 다시 남으로 가서 한국 정부나 미군 측에 더 노력하고 합의가 되면 10일 이내에 판문교에서 기를 흔들라고 말하고 그를 남하시켰다. 내려와서는 미군 수사기관, 우리 특무대, 군법회의, 민간재판 등 수난의 연속이다.
박진목씨는 전쟁 중 북행하여 이승엽을 만난 일로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통일운동에 있어서의 거물급 인사가 되고, 혁신 진영에서는 사통팔달의 인물이 되었다. 물론 극히 일부이지만 그의 정체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민족통일촉진회 등에서 활발하게 일했다.
소설가 이병주씨는 <민초>에서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썼다. “라틴어에 에케 호모(Ecce homo)란 말은 ‘여기 이 사람을 보라’는 의미다. 동주(東洲) 박진목 형을 볼 때마다 나는 이 말을 연상한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성공자도 아니고 승리자는 더구나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을 보라고 하고 싶은 데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 그의 과오 또는 실수까지 합쳐 민족의 애환을 체현하고 있는 것 같은 인간으로서의 그릇과 체취가 그런 매력을 풍긴다. 그의 정열과 모험은 언제나 좌절로 끝난 것은 비극이지만 하나의 인간을 형성하는 데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숱한 고난에도 정열과 의욕을 꺾이지 않았고, 거듭된 좌절도 그에게서 훈훈한 인간성을 빼앗지 못했다. (…) 우리는 여기서 정열의 의미, 좌절의 의미, 애국의 의미, 정의의 의미와 함께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참으로 귀중한 것은 인간에 있어 승리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모색으로서 이 글을 음미한다.”
나는 박진목씨에 관한 수수께끼를 갖고 있었으나 그의 생전에 풀지 못했다.
첫째로, 남로당의 군(郡) 책임자, 더구나 막강한 경북도당 부장급이 무사할 수 있은 데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는 책에서 경찰 지방간부가 봐줘서 무사했다고 썼다. 어떤 이가 한번 직접 물었더니 “내 뒤를 캐기요”라고 화만 버럭 낼 뿐 설명은 안 한다.
둘째로, 그가 미군의 주선으로 북행한 것은 휴전회담이 개최된 후다. 그렇다면 당초의 정전을 위한 노력에서는 벗어나는 사명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국 측이 이승엽의 의중을 탐색하려 보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명의 차원이 달라진다. 첩보활동인 셈이다.
셋째로, 이승엽은 박진목을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낼 정도로 어찌 그리 멍청했느냐는 것이다. 그때는 남로당계가 탄압받기 전이라 권력 기반이 탄탄하다고 믿었던가. 상식적으로는 박진목씨를 그대로 억류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남로당원끼리의 특수관계인가.
넷째로, 박진목씨는 평생을 정보기관과 얽혀 지냈다. 남로당 전향자이니 생존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편리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정보기관과 얽혀 지내다 보면 정보 취미랄까, 정보 재미랄까 하는 것도 생기는 모양이다. 그는 드물게이지만 그만이 아는 ‘정보’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의 활동이나 처신을 볼 때 그는 출중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의 학력을 밝힌 일이 없다. 대졸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화술은 소박하지만 아주 설득력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쓴다. 인맥도 대단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경북의 인맥이다. 뿌리 깊은 유교권이란 점, 자영농이 대부분이었다는 점 등등으로 경북의 인맥은 전국에서 손꼽을 만큼 결속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간혹 남로당을 했던 사람들의 인맥도 있다.
박진목씨가 그렇게 아끼던 정치인 이기택, 변호사 강신옥, 학생운동 출신 김도현씨 등의 회고나 평가가 있었으면….
평화나 통일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은 물론이고 미국·중국을 포함한 나라 사이에서의 정보공작도 매우 치열해지고 중요해질 것으로 본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은 어쨌든 정보공작과도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박진목씨 같은 경우의 케이스 스터디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박진목씨는 권력이나 재물을 탐해서 움직인 적은 없었다. 수수께끼는 남겼지만 우국지사임에는 틀림없다.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