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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소리 국가 / 서해성

등록 2015-07-31 18:35수정 2015-08-04 00:53

해방은 소리로 왔다. 잡음 섞인 ‘라듸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가늘고 높은 일왕 히로히토 목소리를 통해 8.15는 문득 닥쳐왔다. 그날 서울 최고 기온은 33.9도였다. 아침에는 흐렸다가 오후에는 하늘이 갠, 기온이 치솟는 무더운 날이었다. 한국인에게 8.15 그날은 뜨거웠다기보다 일순 정적 같은 것이었다. 한국인 중 쩨오띄케이JODK(경성방송)를 들을 수 있었던 가구는 대략 3.5% 안팎이었다. 광복은 이들의 입을 통해 이윽고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소리와 소문이 한국의 구석까지 닿는 데는 족히 하루가 필요했다.

19450815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교과서 등에 실려 있는 이날을 상징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8.16이거나 그 뒤에 찍은 것들이다. 그날 만세 소리는 없었다기보다 적어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또 상상해온 폭발하는 듯한 격렬한 장면과는 달랐다.

일본에서도 8.15는 소리로 왔다. 이른바 ‘옥음’이었다.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덴노(일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쿄는 흐렸고 32.3도였다. JOAK도쿄 JOBK오사카 JOCK나고야 등 라디오방송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는 747만대가 조금 넘었다. 대략 인구 7천만명으로 보았을 때 반 이상의 가정에 라디오가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8.15는 소문보다는 소식에 가까웠다. 그들은 8.15를 오직 패망으로만 생각했을까. 그날 오후 패전에 불복해 가미카제가 특공출격하거나 할복 따위를 감행한 단말마적 군국주의자들은 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사람 대부분에게도 19450815는 종전이 된 기쁜 소식이었다.

중국 역시 8.15는 소리로 왔다. 일왕의 항복과 관련한 장제스의 승전담화가 충칭 라디오방송XGOY를 통해 오전 10시(중국시간)에 먼저 흘러나왔다. 임시수도 충칭 날씨는 보기 드물게 맑았다. 공산당 거점도시 옌안도 날씨가 좋았다. 두 도시는 그날 기온을 측정한 공식기록이 없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19450815를 맞았던 건 아니었다. 10일에 벌써 일제 항복이 전파된 상황이기도 했다. 중국 대륙은 국민당 지역, 공산당 지역,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나뉜 채 8.15를 상이한 상황으로 대면했지만 기쁨은 다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라디오를 내남없이 집에 사들이기 시작한 건 전쟁 때였다. 승전보는 되풀이 방송되었고 패전은 노래로 암시되었다. ‘우미유카바’(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산에 가면 풀이 돋은 송장)가 느리고 장중하게 나오면 유황도(이오지마)가 사라지고 레이테만이 무너졌다. 암시조차도 뉴스였다. 일제는 철저한 라디오 국가였다. 무솔리니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독일은 대략 2주일 주급이면 살 수 있는 국민 라디오 ‘괴벨스의 코’를 7할이 넘는 가정에 대량 공급해 총통의 목소리와 지시사항을 수신토록 했다. 세계 최고 보급률이었다.

청각은 시각보다 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반복적인 단일한 메시지는 통치권력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데 탁월한 매개체다. 군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청각을 통해 대중을 의식 안쪽까지 장악했다. 이들은 감각의 최소 부분으로 최대를 지배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개별자의 신체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국민체조방송은 그 일상적 정점이었다.

서해성 소설가
서해성 소설가
한국에서 라디오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건 쿠데타 세력이었다. 박정희 대장은 1961년 9월 부산 연지동 라디오공장을 전격 방문했다. 한국 사회를 예령과 동령 체계로 개편시키는 순간이었다. 국경을 넘어, 라디오 뒤에는 확성기가 있었고, 단일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행동을 주입하는 포스터가 그 옆에 자리잡았다. 심장 말고 모든 게 정지해야 하는 국기하강식 부활 주장이 닿아 있는 뿌리가 거기다. 광복 70주년에 말이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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