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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진보정치의 열린 틈새 / 한귀영

등록 2015-07-19 18:46

2004년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율 13.1%를 얻어 단번에 10석을 획득했다. 선거 직후 시골 폐교를 약간 손본 남원연수원에서 국회의원과 평당원이 어울려 밤새 토론하고 의원도 자기 식기는 손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기성 정치의 문법을 깨는 신선한 모습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한때 당 지지도가 20%를 넘었다. 당시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과 정책진용은 정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 보수언론마저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민노당 정책실에는 폐쇄적이지 않고 ‘진보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독종들이 많았다. 이들이 만든 정책이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 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같은 것들이었다. 대형마트 규제는 8년 뒤에 빛을 봤고, 조세개혁과 복지는 지금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이다.”

이 모든 것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덕에 가능했다. 동시에 이 제도의 결함도 적나라했다. 진보정당은 당세에 비해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기대를 모은 의원들을 여럿 배출했다. 비례대표 1회 원칙에 따라 지역구로 출마한 의원들은 명성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거대 기성정당의 조직과 물량전 앞에서 진보정당의 힘은 가냘팠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8할이 선거제도 개혁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제도 탓에 진보정당은 만년 미니정당이었다.

그 시절 이후 십여년 만에 선거제도 개혁의 기회가 열렸다. 내년 총선 전까지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조정해야 한다는 작년 10월 헌법재판소 결정이 발단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정치학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의견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적정한 의원 정수를 ‘최소 330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전체의 70.2%였고, 현재의 국회의원 정원을 유지할 경우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77.5%에 이르렀다. 또 하나 주목할 의견도 있었다. 지구당을 부활하고 정당 설립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정당에 대해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해왔던 이들의 의견이기에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이들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는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정의당 신규 당원이 약 400명에 이른다. 정치의 힘, 가능성을 복구했다는 데서 이번 선거의 의미를 찾고 싶다.

그 가운데 조성주라는 정치 신인이 있다. 그는 당대표 출마의 변에서 2세대 진보정치는 노동운동 밖의 노동자들, 광장 밖의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정치는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고 위로여야 한다”며 “어떻게 정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말로 낙선인사를 마무리했다. 어느 쪽이든 울림이 깊었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시민의 기본 덕목처럼 여기는 세상에, 정치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열망을 신선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모처럼 진보 정치에 가능성의 틈새가 열렸다. 이 틈새가 의미있는 현실로 확장되려면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다. 이상적인 원론들은 일단 제쳐두자면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가 핵심이다. 여야 거대정당은 기득권 유지에 집중할 것이고, 일부 언론은 언제나처럼 개혁을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이 상수들을 변수로 만들어온 것은 결국 대중의 관심과 지지였다. 진보 정치가 그 일을 해내야 한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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