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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막말에 대한 변론 / 박창식

등록 2015-07-07 18:53

민주주의는 본래 번잡하고 떠들썩한 것이었다. 고대 아테네는 민회, 평의회, 시민법정을 두었다. 민회는 언덕에 선착순으로 모인 6000명의 시민으로 구성했다. 시민들은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말하고 투표로 의사를 결정했다. 시민들은 주목을 끌고 호의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주장하고, 청중은 누가 가장 그럴듯하게 말하는지 판단했다. 공동체가 동의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말하기 경연 문화를 꽃피웠던 셈이다.

경연에서 돋보이려면 멋진 스타일로 말할 줄 알아야 했다. 귀족들은 집에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차려놓고 명사를 불러, 말과 지식의 향연(심포지엄)을 즐겼다. 귀족 자제들한테는 이것이 최고의 말하기 교육이었다. 중산층 시민들은 소피스트한테 돈을 주고 말하기와 글쓰기 기술을 배웠다. 소피스트는 공교육 기관이 마땅찮았던 아테네에서 사교육 기능을 수행했다. 귀족보다 서민들이 소피스트를 더욱 애호했다는 사실 때문에 소피스트들이 뒷날 귀족 출신 사상가들의 펜으로 더욱 나쁘게 기록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서는 말하기가 중요하다. 정치는 말로 여론을 형성하는 행위다. 오늘날 민주정치를 실행하는 많은 나라가 학교 교육에서부터 말하기를 중시하고 장려한다. 반대로 말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사회도 있다. 고대 스파르타가 그랬고,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은 권력자들이 하고 싶은 말만 담화문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 하고, 국민들이 말을 못하게 했다. 말을 억누르고 폭력과 뒷공작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말을 장려한다고 모든 말하기를 허용해야 하나?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증오 발언’은 강력히 처벌하는 게 옳다. 독일 형법은 특정 집단한테 증오를 선동하거나 욕설, 악의적 비방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 발언에 대해 최저 석 달에서 최고 5년 징역을 내릴 수 있다. 독일은 나치의 행위를 정당화해 피해자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발언도 처벌할 수 있다. 프랑스는 형법으로 인종·국적·민족·지역·성별·성적 지향·장애 등을 둘러싼 명예훼손과 모욕, 선동 발언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엄금해야 할 말이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오뎅이라고 비유해 모욕한 일베 이용자들을 형사처벌한 것은 당연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행위다.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심하게 폄하한 종편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종북이라고 찍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억누르는 행위는 정말 문제다.

요즘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이른바 막말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윤리심판원에서 당원정지 6개월을 받았고, 조경태·김경협 의원은 7월9일 판결을 대기하고 있다. 정 의원은 주승용 최고위원한테 당직을 사퇴한다고 “공갈치지 말라”고 했으며, 조 의원은 “혁신위원들은 문재인 전위부대”, 김 의원은 “비노는 새누리당 세작(간첩)”이라고 했다. 모두 잘못된 말이며 그중 마지막 것은 더 나쁘다.

그러나 내용을 따져보자. 이것이 사회적 약자를 치명적으로 공격하거나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당내 갈등을 촉발한 것인가. 가령 주승용은 호남 대표 정치인을 자처하는 국회의원이다. 힘없는 비정규직 알바생이 아니라 상당한 권력자다. 공갈 발언이 집단적 상처라 할 만한 사회적 기억을 건드린 것도 아니다. 이 정도라면 무기 동등의 원칙에 따라 주승용이 공개석상에서 정청래한테 멋지게 말로 카운터펀치를 날려 되갚으면 족할 일 아닌가.

박창식 논설위원
박창식 논설위원
정치인의 막말은 당사자들의 논쟁을 통해, 나아가 여론재판을 통해 거르는 게 기본적으로 바람직하다. 정당 사법기구로 가져가면 말을 장려하기보다 말하기를 위축시키기 쉽다. 화려한 말의 기예를 갖춘 대표 선수를 더욱 키워내야 할 정당이 왜 초등학생 벌세우기 같은 일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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