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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의 인간형 / 문강형준

등록 2015-07-03 18:36수정 2015-08-04 01:09

미국 티브이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5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극의 한 축이었던 스타크 가문의 서자 존 스노우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티리온, 대너리스와 함께 사랑을 받던 한 주인공이 이토록 쉽게 죽을 줄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고, 드라마 애청자들은 이 죽음 앞에서 슬픔보다는 허망함을 느꼈다.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시청자들을 충격에 몰아넣는 방식은 <왕좌의 게임>만이 아니라 다른 ‘영드’와 ‘미드’에서 최근 이미 트렌드가 되고 있다.

핵심은 ‘세상은 네가 생각하듯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왕좌의 게임>, <보드워크 엠파이어>, <다운튼 애비>,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충격적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거나, 동정심을 끌어내거나, 올바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운 가치관, 곧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거나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등의 상식을 구현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에 대해 자신을 동일시하며 몰래 응원하지만, 이들은 준비되지 않은 어느 순간 악한 자들에 의해, 혹은 승리와 성취가 다가온 그 순간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가치의 역전이, 진공상태가 펼쳐지는 것이다. 영미 소설에서 주드 폴리, 테스 더비필드, 에드나 퐁텔리에, 제이 개츠비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은 가혹하며, 착한 이들의 작은 소망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상주의 대신 펼쳐지는 현실주의는 이제 소설 대신 티브이 드라마에서 더 큰 빛을 발하는 중이다.

세상은 우리의 정의, 이념, 가치, 동일시와 상관없이 잘 돌아간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눈 하나 꿈쩍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가차 없음의 세계’에 대한 재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 세계 앞에서 1970~80년대의 ‘진정성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던진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만들어낸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여전할 뿐 아니라 더 가혹해졌다. 진정성이 사라져버린 뒤, 1990~2000년대의 ‘속물적인 인간들’은 이미 이러한 세계의 법칙에 적응했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이 정언명령이므로, 그냥 살아남는 것, 더 성취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다. 진정성이 허무를 준다면, 속물성은 역겨움을 준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이제 우리의 문화는 진정성도 속물성도 아닌 제3의 길을 내고 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라는 인기 메뉴처럼, 진정성과 속물성이 반반씩 섞인 그것의 이름은 ‘스마트 반 착함 반인 인간’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원하는 분명한 자기성취를 이뤄낸 이들이다. 노력을 통해 돈, 명예, 인기, 지위 등을 얻어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올바른 가치관, 정의로운 시선도 함께 가지고 있다. 둘 중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 성취만 있으면 속물적 인간이고, 가치만 있으면 진정성의 인간이다. 최근 손석희, 김제동, 최진기, 이재명, 박원순 등이 누리는 인기는 이를 보여준다. 종편에 출연하지만 그곳에서 비판적인 얘기를 하고, 입시체제에 봉사하지만 그곳에서 개혁적인 시선을 내비치고, 제도권에서 성공했지만 그곳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사람. 4대강을 ‘녹조라떼’로 만들어놓고 테니스나 치러 다니는 사람도 싫고, 세월호에서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위해 1년 넘게 천막을 차려 투쟁하는 사람도 힘들다. 우리에게 ‘도덕적 기쁨’을 주는 사람은 성취와 가치를 함께 가진 이들이다. 점점 상승하는 이 새로운 인물형은 성취도 못 이루고 가치도 없는 총체적 무능을 표상하는 박근혜의 세계, 착한 사람들은 다 죽어버린 이 ‘가차 없음의 세계’에 대응하는 인간형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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