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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강기훈 학교 / 서해성

등록 2015-05-29 18:43수정 2015-08-04 01:15

독재자, 파시스트, 군국주의자, 친일파 따위들은 자신들에게 세뇌되지 않는 사람들을 다른 자에게 세뇌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이들이 알고 또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논리는 지배와 세뇌 말고는 배제다. 배제의 이름이 빨갱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이었달 따름이다.

보불전쟁 뒤 독일 땅이 된 알자스 출신 유대인 포병 대위 드레퓌스의 필적을 감정한 이는 알퐁스 베르티용이다. 이 전문가는 파리경찰서 범죄자신원확인부를 창설하고 유형학적 태도로 인체를 측정해서 ‘말로 된 초상’을 작성하던 근대국가의 본격적인 대중감시책임자였다. 베르티용은 파리경찰서 사진부 총책을 역임한 베테랑이었다. 그가 ‘다른 것은 같다’는 인류사적 조작을 악의 명제로 성립시킨 까닭은 간명하다. 조국을 뜨거운 애국심으로 단합시켜낼 수 있다면야 유대인 한명쯤 거리낄 게 없었다.

문화수도 파리에 경찰서 사진부가 생긴 건 코뮌 당시 찍은 기념사진을 근거로 봉기 가담자들을 색출하면서였다. 리얼리즘 미술을 창시한 코뮌예술위원장 쿠르베도 거기 들어 있었다.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중절모를 쓴 그가 시민군들과 함께 나폴레옹 동상을 올려놓은 방돔광장 기둥을 허물어뜨린 뒤 촬영한 사진은 자기 작품과는 달리 사뭇 어리숙한 표정이다. 혁명을 기리던 사진은 코뮌이 무너지자 곧바로 수배사진이 되어 혁명가들을 배신했던 것이다.

드레퓌스를 독일 간첩으로 몰아넣은 근거는 단 한 글자였다. D. 이 알파벳은 정보유출에 사용된 암호명이었고 드레퓌스의 이름 첫 글자와 같았다. 필적감정은 오류를 넘어 프랑스의 권력, 군부, 재판소, 언론, 제수이트세력이 나서서 광적인 국수주의 분위기로 함께 조작에 가담한 과정과 결과의 동의서였다. 인종차별은 대중심리조작을 위한 지렛대 구실이었다. 이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1789년과 그 뒤 대중이 창조해낸 혁명가치를 파괴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지배세력의 거대한 공모는 단지 현상유지에 그치기보다는 조작과 이에 대한 묵계를 조직화하면서 위기를 돌파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내재하고 있다는 걸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1991년 봄 한국에서 감행된 국과수 필적전문가를 동원한 유서대필 조작 또한 광범위한 공조 속에 진행되었다. 두 사건은 필적감정 조작만이 아니라 이에 동조한 주체들, 정치적 목적에서 꼭 배다른 형제만큼 닮았다.

그 봄 독재권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필체가 같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세상을 떠난 청년과 아는 사이라면 이는 더욱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조작을 통해 지배권력은 민주세력을 패륜집단으로 몰아 이들의 인간성이 군부독재보다 못하다는 걸 대중에게 각인, 세뇌시키고자 했다. 시대양심을 배제, 처형해서 윤리세계 밖으로 내쫓고 낙인찍어 전경이 쇠파이프로 대학생을 때려 죽인, 위기에 처한 정권을 구하고 6월항쟁과 민주주의를 내면에서 붕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서해성 소설가
서해성 소설가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입증되었다. 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고 뒤집어쓴 강기훈은 24년이 걸렸다. 무죄로써 유죄로 정의의 시궁창을 기어야 했던 스물네해 동안 정치인, 검사, 판사, 기자, 타락한 지식분자들이 내뱉은 말들은 그의 청각을 타고 몸으로 들어가 암세포가 되었다. 그는 산 채로 타살되었다. 정의는 모든 시대의 고통과 불행에게 양지 같은 학교여야 한다. 강기훈은 여전히 비극의 중심에 서 있고 베르티용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인들이 드레퓌스 학교에서 배웠듯 우리 사회는 과연 강기훈 학교를 마쳤는가.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24년짜리 긴 학교는 앞으로도 거듭 배제를 잉태할 뿐이다. 사진이 코뮌을 기억으로 배신하듯.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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